본문 바로가기
음악

기타연주로 듣는 우리가요 kpop

by 은빛지붕 2023. 10. 17.

 

아침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어깻죽지가 절로 움츠러졌지만 그는 고개를 더 바짝 쳐들었다.

이깟 바람은 바람도 아니야, 중얼거리면서. 그는 이십여 년간 운영했던 회사를 문 닫은 뒤, 두 달 넘게 시체처럼 지냈다.

세상은 암흑처럼 깜깜하기만 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꼭두새벽에 회사로 가서 업무를 시작하고,

남들 다 퇴근한 이후에도 혼자 남아 기를 쓰고 일에 매달렸던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진 것이다.

나이 오십에 빈 들판에 허수아비로 서 있는 꼴이었다.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두렵고, 화가 났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내가 뭘 실수했기에!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홧술을 마셨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위로 겸 걱정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 할 것 없어. 분명히 새로운 일이 있을 거라고.” "그 상황에 오래 머물면 우울증 생겨.

얼른 빠져나가야 해.” 그러나 그는 남의 집 불 구경하듯 하는 그 사람들의 말이 낯설기만 했다.

꼭 그들은 동굴 밖에 서 있고, 그는 동굴 안에 갇힌 기분이기까지 했다. 그가 능력이 있었을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찾아와 힘들다고, 어렵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는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세라 밥 사 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 주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동안 졌던 신세를 갚기라도 하려는 듯 동굴에 갇힌 그에게 빨리

빠져나오라고 소리를 질러 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생각하지 못한 일을 추천했다.
“우리 회사에 와서 궂은일 며칠만 해 줄 수 있겠어?” 친구가 말한 궂은일이란 아이들의 장난감인 브릭을 플라스틱 통에

담는 작업이었다. “알았어. 일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져서 정신 건강에는 더 좋겠 지.” 그는 순순히 그 일을 허락했다.

말 그대로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순 노동이 제일일 것 같았다. 그러나 밤 열 시가 다 되도록 쉬지 않고 브릭을 통에

퍼담는 일은 생각보다 힘겨웠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 쓰는 일만 했던 사람이 온몸을 써서 일을 하다 보니 손발이 뻣뻣하게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친구는 그런 그를 한번도 위로하지 않았다. “힘들지?”하고 묻지도 않았고,

“그만 둘래?”하고 의중을 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일이 끝나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 줄 뿐이었다.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는데도 끙끙 앓느라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친구 회사로 향하고는 했다. 일의 대가로 받는 돈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뭔가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찾고, 세상을 헛살았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했던 것이다. 생각과 달리 날이 갈수록

일의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있었다. 체력의 한계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그일은 그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었다는 후회,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란 없다는 자만심에 대한 반성,

헤픈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심감…. 그때서야 그는 친구의 숨을 뜻을 이해했다. 동굴에 갇힌 사람에게는 빨리 빠져나오라는 바깥에서의 외침

그다지 도움이 되질 못한다. 동굴로 직접 들어가 동굴에 갇힌 사람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말 없이 곁을 지켜 주는 것이 훨씬 큰 힘이 된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동굴에 갇혀 꼼짝 못하는 그의 곁을 그렇게 말 없이

지켜 주었던 것이다. 그가 스스로 용기를 내어 동굴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말했다. "내일부터는 그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겠어. 그 일은 동굴에 갇혀 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든.

동굴을 빠져나온 사람은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일을 찾아야지.”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어깨를 소리나게 탁 쳤다. 

"짜아식, 대견하네. 그렇게 빨리 동굴을 빠져나올 줄이야.” 친구의 말이 너무도 따뜻해 그는 서둘러 눈을 가렸다.

혹시라도 눈가에 어린 물기를 친구에게 들킬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