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쥐가 날 때면
무엇이든지 흐르지 않고 정체되어 있으면 고장이 나기 시작하고 잘못되기 시작한다.
한곳에 오랫동안 힘을 주고 버티어 있으면 피가 잘 돌지 않아 한쪽 팔이나 한쪽 다리는
쥐가 나서 아무감각이 없고 움직일 수 없다. 한참을 주물고 가만히 안정을 취한 후에야
움직일 수 있다. 운동선수들이 격하게 뛰다보면 다리에 쥐가 나서 근육이 수축되어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 몸속에 피의 흐름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해 나타나는
고통의 현상이다.
펭귄은 영하40도의 남극에서도 잘 살아간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그 차가운 얼음
위에도 발을 붙이고 잘 버틴다는 것이다. 펭귄의 발바닥에는 아주 미세한 혈관이
놀라우리만치 많은 피가 잘 흘러서 차가운 곳에서 잘 견딘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 쥐가 나는 고통과 경련이 올 때도 많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문제와 사건 앞에 생각이 경직되고 피가 돌지 않아 쥐가 나는 것처럼 고통이 온다.
이때는 가까운 곳 보다는 먼 곳을 바라보아야한다. 지금의 문제에 집착하다보면
이 문제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그 문제 속에 빠져버리면 자신의 모든 삶이 부정적이고 실패로만 보일 뿐이다.
이때 크게 심호흡을 하고 멀리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잊고 놓쳤던 말씀을
회복하고 하나님주신 성령 충만함을 내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깊은 묵상 속에 자신의 영혼을 머물게 할 때 서서히 지금의 문제가 작아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면 나의 상처 나의 욕심이
깊은 기도 속에서 배설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바라고 원했던 문제들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성령 충만을 회복하고 말씀의
흐름 속에 머물다 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이 나의 육신의 지배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아니다.
내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멍하니 한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노래도 있다. 그만큼 생각과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힘들다.
쥐가 나는 고통이 닥쳐온다. 내 생각과 마음으로는 어떤 정답도 없다.
그래서 믿음의 시작도 내 생각이 나도 모르게 바뀌어 가는 과정 인 것이다.
이 응답을 누렸던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나의 복음도 이제 내 삶 속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숨은 계획을 찾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순간순간 넘어지고 불신앙이 밀려온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강함이 내 속에 임하게 하소서!..
바울에게 주셨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굳건한 믿음처럼 우리들 자신도 언약의 말씀이
우리들 자신 속에 각인 될 때 현재 쥐가 나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도 넉넉히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은 완전하고 복음 안에 있는 자는 어떤 세상 근심에서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무엇 때문에 이 땅의 고통 속에 머물 수 있겠는가?..
복음 속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제 모든 것 맡기는 삶이 되는 것이다.
갈2;20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철저히 각인 될 때 나는 어떤 세상의 문제나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