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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시간

은빛지붕 2023. 7. 15. 00:05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 십 년 넘게 이분이 세운 자선 의원에서 동고동락했기에 슬픔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워낙 건강했기에 암 선고는 날벼락이었다. 위암 판정 후 1년의 투병 생활 동안 수술과 항암 요법, 방사선 치료

등 모든 의학적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생명의 비밀과 신비 앞에서는 과학도 의학도 인간적인 기대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1년, 생존율이 20퍼센트입니다.” 주치의가 선고를 내리는 순간, 딛고 있는 땅이 아래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부터 의사가 아닌 환자로서 20퍼센트의 생존율에 도전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하지만 운이 없었다.

수술 후에 암은 빠르게 전이됐고 항암제의 부작용은 온몸을 망가지게 했다. 몽땅 빠져 버린 머리카락, 당당하고

듬직했던 몸은 해골처럼 앙상했고, 어떤 진통제로도 통제가 안 되는 지독한 통증은 지옥이었다. 손톱과 발톱이 다

빠진 자리는 시커멓게 변해서 감각을 잃었다.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는 구토와 통증이 점점 삶에의 집착을 부수었다.

죽음이 다가왔다. 의과 대학 시절부터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면서 의사에게 보장된 부와 명예를

일찌감치 포기했다.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길이 의사로서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하고 결혼이라는

범한 길을 버리고 독신을 선택했다. 달동네와 쪽방촌의 주민들, 거리의 노숙인들에게 의술과 인술을 바치는 데,

23년의 생을 쏟았는데…하필이면 왜 이분이? 모두에게 의문과 원망과 충격이었다.


1년 후 주위의 정성과 간절한 기도를 뒤로하고 그분은 떠났다. 짧았던 투병과 갑작스런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사실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며 더 나아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죽음 앞에서 몸부림쳐 보고 절규해 보지만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절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암 병동의 복도를 거니는 중 바로 병실 문 앞에 ‘절대 안정’이라고 쓴 팻말이 붙은 것을 보았다.

간호사에게 물어 보니 한 선교사가 간암으로 입원 중이라고 했다. 간호사의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임이 분명했다. 뜻밖에도 햇볕이 잘 드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선교사님은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분의 병실 앞에는 식사 때마다 배달되던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그분의 아내는

나를 보고 눈물을 훔쳤다. 젊은 시절부터 10년 동안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선교와 봉사를 해 온 남편과 영영 헤어질

순간이 온 것이다. 서른여덟 살. 그러고 보니 선한 눈빛과 미소를 가진 창백한 선교사님의 얼굴에는 생의 미련을

버리려는 단호함이 있었다. 며칠 후 선교사님의 병실 문에는 ‘절대 안정’이라고 쓴 팻말도 사라지고 병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어젯밤에 돌아가셨다고 한다.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곁에 계신 분들이었다.

두 분 다 숭고한 삶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고귀한 분들이었다. 이분들의 죽음은 허망하고 부당하게 보였다.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지? 하필이면 왜 이분들이어야 하는지? 삶과 죽음의 의미가 깊이 다가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억울한 죽음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특히 환자들로 넘쳐

나는 암 병동에서 희귀병이나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며 죽어 가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이었다.

저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어째서 비참한 투병을 해야 하는지?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천사와 같은 머리 깎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볼 때마다, 그 부모들의 고통을 볼 때마다 절규했다.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사실 환자뿐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왜 그처럼 불행한 사람이 많은 것일까.

산더미같은 음식 쓰레기 한편에서 하루에 한 끼도 못 먹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고, 화려한 물질 만능의 광장 바로

한편에서 소외받고 가난한 이웃들이 쪽방에서 슬퍼하고 있다. 그들의 고통과 불행과 가난이 그들의 업보 혹은 죄

때문일까? 그렇게 세상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항의와 질문을 퍼붓고 있을 때 어느 날 주님은 내 귀에 속삭이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마치 암흑 속에서 한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한줄기 빛이었다. 죄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진리다. 내가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내가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이다. 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내가 울고 내가 굶주리고

내가 슬퍼하고 내가 병으로 십자가를 지고 신음할 때도 나 자신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바로 내 곁에서

이렇게 위로하신다.“슬퍼하지 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굶고 너와 함께 고통 받고 너와 함께

신음하고 있다. 하늘나라가 너의 것이다.” 그렇다.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야말로 지상의 가치관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다. 죽음은 우리의 인생 중에서 가장 엄숙한 시간이며 사건이다.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이 엄숙한 사건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