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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 십자가

은빛지붕 2023. 7. 17. 00:05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세상에 박복(薄福)한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주(周)나라 초기 강태공(姜太公)의 부인 마(馬)씨라는 여인만큼

팔자 기구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녀의 남편인 태공망 강상(姜尙)은 10년이 넘도록 허구한 날 방구석에

앉아 책에 빠져 있거나, 그러다 쫑이 나면 웨이수이 강가에 나가 낚시질하는 것밖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물고기 한 마리 잡아 오기를 하나 그저 뻐드러진 바늘에 미끼도 꿰지 않은 낚시를 강물에 담그고

흘러가는 세월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런 남편을 봉양하느라고 마씨 부인은 품팔이, 이삭줍기에 몸이나 옷이나

넝마가 되어 있었다.엉덩이 땅에 붙일 틈도 없이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가뭄에

벌겋게 탄 들에 나가 잡초에 불과한 피를 훑어 마당 가운데 멍석에 널어놓고 품앗이를 갔던가 보다.

나가면서 날씨가 수상하니 비가 오거든 좀 걷어 놓으라고 남편에게 당부를 했겠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소낙비에

널어놓은 곡식은 한 톨도 남김 없이 떠내려가고 비에 젖은 빈 멍석만 마당귀에 걸려 있었다.
억장이 무너진 마씨 부인이 질퍽한 마당에 퍼질러 앉아 목을 놓고 신세 한탄을 하며 울다가 결심한 듯 주섬주섬

넝마 같은 옷가지를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남편이 만류했지만 당신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겠느냐고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정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친정에서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이삭 줍고 품을 파는 고달픈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문왕(文王)에게 발탁이 되어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국무총리쯤 되는 벼슬에

오른 강태공이 높은 마차를 타고 순행을 나섰다. 만백성이 그 앞에 굽신거리는 행차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밭고랑에 고부라져 이삭을 줍다 그 광경을 보게 된 마씨 부인이 바구니를 팽개치고 번쩍거리는 마차 행렬 앞에

나아가 남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당신이 이렇게 고귀하게 되었으니 지난 10여 년 동안 그 고생을 다해 가며 당신을

먹여 살렸던 나를 다시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수레를 멈춘 태공이 부인에게 물 한 그릇을 떠오라고 시켰다.

마씨 부인은 정성스럽게 물을 떠다 바쳤다. 물그릇을 받아 든 태공이 그 물을 땅에 쏟아 버렸다.

그러고는 그 물을 그릇에 다시 주워 담으라고 시켰다.마씨 부인은 땅에 스며든 물을 주워 담으려고 부리나케 손바닥으로

땅을 긁어 댔지만 진흙만 손가락에 엉길 뿐 물은 한 방울도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망연자실(茫然自失) 전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에게 태공은 이렇게 외쳤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법이오.

그러니 당신과의 인연도 돌이킬 수가 없소. 그것이 그대의 운명인 듯싶소.”

그러고는 마차를 재촉해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 가는 마차의 화려한 뒷모습을 낙담상혼(落膽喪魂) 바라보는 부인을 강태공은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야속하다고 했을 것이다. 몰인정하다고 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하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준엄한 교훈도 담긴 일이고, 부부로 산다는 것은 물건 값 

흥정하듯이 그렇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저 참고 사는 김에 조금만

더 참고 살걸 하는 뼈아픈 후회만 곱씹으며 품 팔고 이삭 주우며 남은 평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세상에는 거의 다 된 것을 조급해서 망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고비만 더 넘겼더라면, 한 길만 더 팠더라면,

한 시간만 더 기다렸더라면, 한 모퉁이만 더 돌아갔더라면 목적을 이루었을 것을 다 된 밥을 엎어 버리고 마는

경우 때문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조금 못 미치는 것 때문에 지금껏 기울인 수고가 헛된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어찌 적다 하랴.


십자가를 자르지 마라
사는 게 힘들면 꿈에서도 고달픈 것이 인생살이인지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꿈을 꾸게 되었던가 보다.

어떤 사람은 큰 십자가를, 어떤 사람은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틈에 끼어 가는데 자기 십자가가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갈수록 등에 진 십자가가 무거워 참다못한 이 사람이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어느 나무 그늘에 십자가를 내려놓고 톱을 구해서 밑동을 자르기 시작했다. 한 토막을 잘라 내고 나니

아주 가뿐해졌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는 걸 몰랐다니. 그는 신이 나서 킥킥거리며 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십자가를 잘라 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몽당 십자가가 되고 말았다. 끌리는 것도 없고 아주 작아져서 별 힘들이지

않고 가뿐가뿐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그가 몽당 십자가를 지고 도착한 곳은 어느 산마루였다.

저만큼 산꼭대기에 예수께서 손을 흔들며 사람들을 환영하고 계셨다. 환한 얼굴로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돌아오는 국가 대표 선수들을 환영하듯이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다. 이 사람도 몽당 십자가를 지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람이 그냥 건너뛸 수 없는 깊은 계곡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 아래로는 까마득한 절벽이어서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곳이었다. 예수께서는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지고 온 십자가를 계곡에 걸치고 건너오라

손짓을 했다.아뿔사! 생긴 대로 끝까지 참으며 지고 온 사람들의 십자가는 계곡에 걸치고 건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몽당 십자가는 길이가 턱없이 못 미치고 있었다. 거의 다 왔는데, 고생도 거의 함께했는데,

이 사람의 십자가는 너무 많이 잘라 내서 이제 계곡을 건너는 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 절벽 위에 서서 땅을 치고 후회를 했지만 그는 끝내 저 건너 낙원으로 건너갈 수가 없었다.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장 24절)고

부하신다. 아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장 38절)

고 잘라 말하신다.삶이 십자가 아닌 것이 있으랴. 진실되게 사는 것이, 사명(使命)의 길을 가는 것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랴.십자가를 자르려고 하지 마라.

조금만 참으면 십자가를 다리로 삼고 건너가야 할 계곡에 이르리니 그 깊은 구렁은 남의 십자가로는 건널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제자들에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장 13절)고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계신다.
사는 것이 곧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해 무엇하랴. 뜰에 살구나무도 꽃샘바람을 참고 꽃을 피우더니,

비바람, 뜨거운 햇빛을 견디며 부지런히 열매를 키우는 7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