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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다시 달리자.

은빛지붕 2023. 7. 16. 00:03

 

 


아들 내외가 느닷없이 아이들을 한나절만 맡아 달란다. 손주들 보는 일이야 배고픈데 시루떡 맡아 달라는 격이라 

얼른 대답을 했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히죽히죽 웃기만 하고 그냥 나간다.

제 엄마 아빠가 나가고 난 후 손주 하영이가 내 귀를 끌어당기더니 속삭인다.
“할아버지, 이거 비밀이야. 엄마랑 아빠랑 마라톤 나간대.”  “마라톤! 느닷없이 무슨 마라톤이라니?”
아이는 신발을 벗자마자 냉장고를 뒤지러 달려가면서 숨도 안 쉬고 쫑알거린다.
“글쎄 말이야, 일등은 못하겠고, 그냥 선물 받으러 간대. 티셔츠를 준대나. 아주 유명한 회사거래.

엄마 아빠가 똑같은 거 입고 다니려나 봐. 그래서 연습도 많이 했대.”  “그래에, 네 아빠가 달음질은 별론데….”
어찌된 셈인지 우리 집 식구들은 원래 달리기에는 별 소질이 없는 집안 내력이 있다. 나도 초등학교 다니면서

운동회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꼴등은 받아 놓은 밥상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 말로는 어려서

외아들이라고 추위 탈까 봐 너무 솜바지에 싸서 키운 탓이라고 하는데 글쎄 솜바지가 들으면 억울해서 옆구리가

터질 일이다. 그 시절에 햇솜 두툼하게 넣은 솜바지 안 입고 학교 다닌 아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우리 집

아이들도 그 많은 운동회를 하면서 한번도 달리기에서 상을 타 온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5천 미터, 1만 미터, 마라톤 등, 한꺼번에 세 개의 금메달을 딴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은 그가 달리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사람은 달린다.”
사람이 달리는 것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람의 본능이라는 뜻이다.

하긴 아이가 태어나서 기어 다니는 시절 말고는 곧장 달리기를 시작한다. 아이의 걸음마라는 게 곧 달리기이다.

엄마가 팔을 벌리고 아이를 보듬을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 영락없이 달려와서 엄마 품에 안기지 않던가.

그뿐인가, 인류가 발명한 모든 탈것이라는 게 다 이 달리기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면 누가 토를 달 사람이 있을까?

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자전거고 자동차고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달리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고

열심히 달려야 신 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따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마라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간해서는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는 게 마라톤이다.
손기정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2012 손기정 평화 마라톤 대회’에 삼육대학교 김상래 총장이 풀코스

완주해서 화제가 되었다. 말이 그렇지 50대 중반의 나이에 더구나 한번도 마라톤 경력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가 마라톤

풀코스 42.195킬로미터를 뛰었다니 뉴스가 될 만도 하다.김 총장은 완주 후 YTN과 인터뷰에서 “대학생들이 진로가

려워 하도 좌절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비전을 나눠 주고 싶어서 뛰었다.”

라고 소감을 전했다. 그날 이런 김 총장 곁에서 동료 교수 및 학생, 친구 등, 주변 사람 2천 여명이 함께 달렸다니

이 불황과 좌절의 시대를 이겨 나갈 적지 않은 용기를 함께 나눴을 것이다.


이 젊음의 좌절 시대에
젊은이들이 너무 지쳐 있는 시대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 가며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이다. 수십 번, 심지어 어떤 학생은 100번도 넘게 입사 지원서를 썼지만 오라는 데가

없다고 주먹으로 땅을 친다. 그래서 작년에는 일하고 싶은 대학 졸업생 열 명 중 여섯 명이 놀고 있다는 통계이다.

아침마다 아라비아의 모래사막에 선 것 같은 막막함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주저앉게 하고 있다. 40만 명

넘나드는 청년 실업자 중 취업 스트레스로 매년 자살하는 청년이 3,600명을 넘는다는 보도가 젊은이들의 막막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그들을 한꺼번에 도와줄 방법은 누구에게도 없다. 새 대통령께서도 선거 공약으로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립 대학의 사활이 걸린 대학 평가에서 졸업생 취업률이 가장 중요한 평가 항목 중 하나다.

그래서 대학마다 기를 쓰고 노력하지만 사회 전체가 불황인데 대학 총장이 무슨 수로 졸업생 취업을 한주먹에 해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지친 젊은이들 곁에서 함께 달리기라도 하면 좀 용기가 될까 해서 함께 뛰다 쓰러질

각오로 나선 김 총장의 심정이 백번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다. 지난해 일본인으로서 19번째 노벨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 교토대 iPS(유도만능줄기세포) 연구 소장은 노벨상을 받은 후 NHK와의 인터뷰에서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야 보람과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리라. 그는 정말 마라톤처럼 순탄치 않은인생을 산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실패만 겹쳐 20여 년 동안 계속

울고만 싶어지는 좌절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의대를 졸업한 후 정형외과 수술을 잘못해서 선배들로부터 참기 어려
운 야유를 들었고, 결국 의사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3년 동안

맡겨진 일은 실험용 쥐를 돌보는 일이었다. 결국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뛰어들어

숱한 어려움 끝에 드디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것이다. 주저 앉지 않고 끝까지 달려야 승부가 나는 것이 마라톤이다.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달리마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은 우리나라의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자랑스러운 대회였다.

그 대회 중 잊지 못하는 인상 깊은 경기 중 하나가 400미터 준결승 경기였다. 그날영국 출신의 데릭 레드몬드는 영국의

이전 기록을 갈아 치우며 올라온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5번 라인을 출발한 지 16초만인 150미터 근방에서 순조롭게
달리던 그가 갑자기 다리 근육 파열로 튕겨져 나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진행 요원과 의료진이 달려와서 그를 밖으로

옮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데릭은 근육이 파열된 다리를 끌며 다시 일어서서 깨금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진행 요원은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손을

저으며 절뚝절뚝 앞으로 걷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관중석에서 중년 남자 하나가 경기장 안으로 달려 나왔다.

갑작스런 사태에 진행 요원이 그를 막아섰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내가 저 선수의 아버지요, 저 애가 내 아들이란 말이요!”

고 외치며 막무가내로 데릭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아들의 어깨를껴안으며 외쳤다. “얘야, 위험하니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아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녜요, 아버지. 저는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달리자. 내가 너를 붙들고 따라가마.” 그러고는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를 더욱 굳게 껴안고 남은 코스
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선수들은 모두 결승선을 통과한 후였지만 아버지는 절뚝거리는 아들의 어깨를 껴안은 채

운동장을 끝까지 돌아 나오고 있었다. 카메라가 그들을 집중해서 비추자 7만여 명의 관중은 모두 일어서서 두 부자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우승자가 누구였는지는 별 관심도 없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레드몬드 부자에게 수많은 관중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정말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인생살이나 마라톤이나 사람이 한 목숨 걸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 어찌 서로 닮지 않았으랴.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의 역정(歷程)을 다 끝내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디모데후서 4장 8절, 쉬운 성경).


하나님은 삶의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달리다가 지친 사람 곁에 다가오셔서 함께 달리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31절)라고 보증하신다. 그리스도는 3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누워 있던 사람에게 “네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요한복음 5장 8절)고 재촉하신다.
심지어 죽어서 상여에 실려 가는 젊은이를 향해서도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누가복음 7장 14절)고

명령하신다. 마라톤 선수 엘리야가 지쳐서 로뎀 나무 아래서 죽게 해 달라고 드러누워 있을 때 다가오셔서 다시 달리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단지 말로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데릭의 아버지처럼 실제로 함께 걷고 뛰고 달리면서

힘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다. 사람을 지어내실 때 달리는 본능을 주셨던 하나님이 달릴 힘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리자. 아직 주저앉기에는 우리의 튼튼한 두 다리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날 아디다스 티셔츠를 얻어 입고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온 아들 내외에게 얼마나 달렸느냐고 물었더니 겨우 10킬로미터를 달렸단다. 용기가 가상해서 애들 돌본 품삯은 못 받고 오히려 저녁만 한턱 쏘고 말았다. 다음에는 나도 함께 달리고

싶다. 좀 노력하면 그 정도야 못 달리랴. 아들의 어깨를 붙들고 달리더라도 그렇게 함께 달리는 동안에는 적어도 희망과

꿈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