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장 월하문 앞에 서서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는 것을 한 편의 글을 퇴고(推敲)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그냥 잡기장(雜記帳)처럼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야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한 편의 수필처럼 또는 시처럼 아름답게,
품위 있게 살려는 사람은 문장을 고치듯 자신의 사는 모습을 다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강릉 경포호 가에 있는 선교장(船橋莊)의 대문인 월하문(月下門)의 주련(柱聯)에는 ‘퇴고(推敲)’의 대명사로 알려진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詩)가 붙어 있다.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러 들고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생각해 보면 이 시가 월하문 기둥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세상에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바로 앞에 펼쳐진 경포호에 석양빛이 깃들면 갈대숲에 오리 떼가 졸고, 나지막한 뒷산 노송에는 산새들이 날아든다.
이 호수 건너 저만큼 동산(東山)에 달이 떠오르면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했던가, 구름 따라 물결 따라 주유(周遊)
하는 스님 하나 달빛 아래 하룻밤을 쉬어 가고자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선하지 않은가?
고루거각(高樓巨閣)의 초라한 대문
선교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쉼터의 그늘에 앉아 있는데 이웃 사람처럼 수수한 차림으로 다가와
앉는 분이 있어서 인사를 나누었더니 선교장의 문중(門中)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선교장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헌 자루에서 콩 쏟아지듯 설명이 쏟아지기 시작한다.“제게는 8대 조모(祖母) 되시는 안동 권 씨 할머니께서 충주에
사시다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외아들 한 분을 업고 이곳 외가에 오셨답니다. 그분이 바로 저의 7대 조부이시고
효령대군의 11대 손이며 이 선교장을 세운 내 자 번 자(李乃蕃)를 쓰시는 분이지요. 본래 이 강릉이라는 곳은 인심이
그리 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태백산맥이 높게 가로막혀 있고 한양에서 거리가 멀어 내왕이 쉽지 않아서
중앙의 통치력이 느슨한 곳이었고, 또 산이 바짝 해변에 다다라 있어서 농토가 비좁아 양식이 풍부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림들이 모두 옹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선교장 주인께서는 일찍이 실학(實學)에 눈을 뜨시고 지역경제
(地域經濟)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샅샅이 살피다가 강릉의 안목항에 사구(砂丘)가
형성되어 있는데 파도가 거센 날이면 바닷물이 들어왔다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바로 이곳이
염전(鹽田)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이 지역 사람들은 무슨 일이 막힘없이 잘되는 것을 가리켜
‘전주염전 되듯 한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할아버지께서 시작한 염전입니다. 염전이란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간만(干滿)의 차가 심한 곳에서나 하는 것으로 알았지 동해에서 염전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금을 만들었으니 사업이 잘될 수밖에 없었지요.
염전으로 큰돈을 번 할아버지께서 그 다음으로는 가답(加沓)에 눈을 돌렸지요. 산이 가깝고 들이 좁아 논이 부족한
이곳에서 우선 해변에 석호(潟湖 : 강어구에 모래언덕 등으로 바다와 분리된 작은 호수)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메우거나 해변에 둑을 쌓아 간척(干拓)을 하여 논을 만들었습니다. 또 산이 높아 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밭은 논으로 만들어 나갔지요.이곳은 논이 적어서 쌀이 부족한 곳이라 쌀을 가진다는 것은 당시로는 대단한 권세를
가진다는 것이었지요.그렇게 해서 점점 논을 늘린 것이 위로는 주문진을 넘고, 남쪽으로는 삼척까지 동해안 일대와
정선, 임계, 평창까지 15개 면이 거의 선교장의 농토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만석꾼이라는 칭호를 듣게 된 것이지요.
강릉의 만석꾼 집안이 소문이 나자 한양에서 공무로 온 벼슬아치들이 자주 드나들고 함경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과객
들이 자주 들러 가게 되었고, 한양 쪽이나 팔도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 지방의 세력가들은 정보수집차 자연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다 보니 손님은 많아지고, 자연히 집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지요. 그래서 이
큰 집이 대부분 그런 필요에 의해서 증축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이 많다 보니 원래 집 앞에 경포호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배를 보내 사람을 건네는 일이 번거로워 아예 물 위에 배를 연결해서 다리를 놓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배다리, 즉 선교장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충청도에서 오신 분에게서 논에 날아온 새를 쫓으며
‘후여 후여, 이놈의 새야. 맘씨 좋은 강릉 이 부자 집에나 가지 왜 이 좁은 논다랭이를 다 먹냐. 후여 후여.’라고 새를
쫓기도 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전국에 꽤 알려진 집이었다는 증거죠.
선교장이 삼 세기 가까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면서 어찌 위기가 없었겠습니까? 첫 번째 위기는 동학란이었지요.
동학군이 강릉까지 들어와 내일 아침이면 권문세가인 선교장을 치려고 했었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이 지역의
농민들이 일어나 동학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동학군이 홍천으로 퇴각해서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6·25 동란
기간에는 인민군이 한 달이 넘게 주둔하기도 했지만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던 것도 단순한 대지주 행세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이곳에서 개화라는 저의 조부께서 한때 동진학교를 세워 한 학년을
50명씩 두 반으로 나누어 인재를 양성했는데 몽양 여운형이 영어를 가르치고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국사를
가르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윤치호도 이 학교를 지도했었지요. 개혁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이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려 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1911년경 폐교하고 말았습니다.”선교장은 본래 99간이나 되었고 현재 남은 것만도
85간이 되는 대저택인데 이상하게도 입구에 있는 대문은 폭이 겨우 여섯자(2미터) 남짓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 문중 사람이라는 분에게 이만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의 대문으로 문이 너무 초라하다고 했더니 “그것은 혹 과객
(過客)이 문을 두드리는데 너무 위압감을 주지 않도록 일부러 아담하게 만든 것이랍니다.”라고 설명한다.달빛에
문을 두드리는 스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갈 곳없는 가난한 과객(過客)들이 이 집 문을 두드렸을까를
생각하니 주인의 마음씨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는 열화당(悅話堂)의
당호(堂號)를 보며 도연명의 시를 떠올려 보았다. 소나무 푸르고 국화 향이 짙은 향촌(鄕村)이 그리워 벼슬도 팽개쳐
버렸던 도연명도 아마 이 집 주인만 한 복은 다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 :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낙금서이소우(樂琴書以消憂) :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라보니 집 뒤로 작은 산등성이가 십장생(十長生) 병풍을 편 듯 푸른 소나무를 가득 채워 둘러 있고,
앞으로는 넓은 마당 건너 푸른 연잎이 가득한 연못가에 활래정(活來亭)이 물속 깊숙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저만큼 넓은 들을 지나 경포호가 잔물결을 반짝이며 동해의 굽이치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곳이 참명당
이라고 했더니 그는 “명당이란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느냐라기 보다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
고 대답한다. 자신의 조상에 대해 그리고 그 업적에 대해 이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가 무척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명당은 위치보다 역할이라는 그의 말이 오래오래 가슴을 때리는 북소리로 들렸다.
소금이 짠맛을 내야 하듯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전한 산상수훈에서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렇게 타이르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3~16절).
소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짠맛을 내는 역할을 위해 있다는 것을 들어서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단지 존재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치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경치에
고대광실(高臺廣室) 집을 짓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해도 이웃을 위해 또는 지역사회를 위해 아무런 기여가 없다면
후세에 어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인가? 지위나 권세도 학식이나 뛰어난 재능도 다른 사람을 위해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면 무가치하다는 깨우침이다.또 등불을 켜면 마땅히 집 안을 다 비출 만큼 높은 곳에 드러나게 두는 것이지
등불을 켜서 물동이나 곡식 되는 말로 덮어 불빛이 비치지 못하게 가리는 미련한 사람이 없듯이 재주나 능력을 숨겨
두지 말고 널리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당부도 들어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왕에 불을 켰으면 좁은 항아리
속만 비추지 말고 온 집 안 구석구석 더 널리 비추라는 깨우침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한 시대를 살게 하신 뜻이라는 말이다. 소중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 마음껏 맛을 내고 세상을 밝게 하는 것만큼 큰
특권이 어디 있으랴. 그 사명을 이루는 것만 한 복과 영광이 따로 있으랴.사시절 바닷바람이 거센 이 척박한 땅에서 그저
가난에 굴하지 않고, 선비의 도포에 흙을 묻히고, 갓끈에 소금을 묻혀 가며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고, 쓸모없는 습지를
메워 논을 만들고, 산기슭의 자갈밭에 물을 대 개답(改畓)을 해서 수많은 천민과 민초들, 심지어는 몰락한 양반들의
살길을 마련하고 누대(累代)에 걸쳐 큰 등불의 역할을 했던 선교장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을 잔뜩 안고 참 아름다운
장원(莊園)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