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과 참빗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올 때 / 장다리꽃은 가장 짙다. / 남녘으로 떠돌며 / 사무치게 사람들이 그리울 때면 /
장다리꽃 껴안았다.”는 도종환 님의 시구(詩句)처럼 지금 남도에는 장다리꽃이 한창이다.
노랑나비는 노란 배추 장다리에, 흰 나비는 흰빛과 보랏빛이 섞인 무 장다리에 숨바꼭질하듯 숨고 나는 모습이
고향에서 소꿉장난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온 듯하다. 정말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라 장다리꽃이라도 껴안고 싶은
시절이다.텃밭에 장다리꽃이 가득하고 울타리가 낮은 남도의 어느 집, 군데군데 붉게 녹슨 양철집의 볕 고운
툇마루에서 며느리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친정에 온 딸인지 중년의 아낙네가 머리가 허연 노인의 머리를 빗겨
드리고 있다. 귀가 좀 어두운 듯 가끔 되묻는 노인에게 뭐라고 열심히 이야기를 건네며 오래오래 머리를 빗겨
드리는 모습이 정갈한 한지(韓紙)에 그린 한 점 묵화(墨畵)처럼 정겹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모습이다.왜 그런지 모르지만 내 기억에 가장 정겨운 모습은 저렇게 두 사람이 앉아서 머리를 빗겨 주는
장면이다. 젊은 엄마가 이제 처음으로 유치원에 가는 어린 딸을 달래고 어르며 머리를 곱게 빗겨서 핀을 꽂거나
땋아 주는 모습도 그렇고, 오랜만에 친정에 온 딸이 이제 나이가 많아 몇 가닥 남지 않은 어머니의 머리를 다듬고
빗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의 빗질에 머리 뜯기던 이야기를 담담히 나누는 모습을 보면 왠지 콧등이 시큰해 오는 것이다.
얼레빗과 참빗
그리 먼 옛 시절도 아니지만 우리 어린 시절에는 여인들이 아무리 가난해도 시집갈 때 빼지 않고 챙겨 가는 것이
빗이었다. 고된 시집살이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곱게 빗고 단정한 몸가짐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것이 빗이었을 것이다. 경대나 화장대를 챙길 형편은 못되고 곱게 접은 한지(韓紙)에 빗 한 쌈을 싸서 시집가는
딸의 보따리에 넣어 주던 옛 어머니들의 눈물 그렁그렁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빗은 원래 머리에 기름을 바르거나
비듬 또는 때를 제거하고 이나 서캐를 훑어 내는 데 썼다. 빗살이 성긴 얼레빗은 반달 모양을 닮았다 해서 월소
(月梳)라 했으며 거친 머리를 초벌 간추리는 데 썼다. 진소(眞梳)라고 해서 빗살이 촘촘한 참빗은 이나 서캐를 훑어
내거나 머리 빗기의 마지막 손질을 하는 데 쓰이던 것이다. 빗도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상아나 은장식을 한
고급 빗도 있었고 박달나무나 대나무로 만들어 주황색칠을 한 것은 보통사람들이 쓰던 것이다.이제 옛날처럼 길게
땋은 댕기머리나 아낙들의 낭자머리가 희귀해지면서 그런 빗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파마머리와 커트 머리에 맞춰
말아서 감거나 부풀리기 위해서 쓰는 플라스틱류의 빗의 물결에 휩쓸려 얼레빗과 참빗이 사라지면서 어머니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 앉아 서로의 머리를 빗겨 주던 정겨운 풍경도 사라져 찾아보기 힘들게 되고 말았다.
빗질과 대화
서광선 교수는 대화(對話)란 빗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깊숙이 파고들어서 긁고 훑어서
단정하고 정갈하게 간추려 내는 빗질처럼 대화는 상대의 복잡하게 얽혀진 마음에 파고들어서 그의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한다는 뜻일 것이다.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것이
머리 빗질이다. 어린 시절에 가끔 어머니가 서둘러 학교에 보내야 할 어린 딸에게 함부로 해대는 빗질 때문에 눈물을
찔끔거리는 여자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었다.머리카락이 엉켜 있으면 우선 얼레빗을 머리카락 사이로 깊숙이 집어
넣어서 대강 풀어낸 다음 한 자락씩 잡아서 물을 발라 참빗으로 빗으면 단정한 머리가 된다. 때로는 머리카락이 단단히
엉켜 뜯기는 경우가 있겠지만 무작정 잡아당기지 않고 인내심과 침착함으로 한 가닥 한 가닥 빗어내려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도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빗질을 하듯 상대의 가슴에 쌓인 궁금증, 원(怨)과 한(恨),
외로움의 실타래를 자락자락 풀어내는 것이 진정한 대화다.아무리 엉키고 맺혀 있어도 참을성 있게 빗질을 하면
풀어내지 못할 머리가 없듯이 진지하고 차분한 대화를 통해서 풀어내지 못할 만큼 마음에 맺혀 있는 것도 별로 없으리라.
외로움을 훑어 내듯
시골에 계시는 장모님께 가끔 전화를 한 적이 있다.
6남매를 길렀지만 모두 출가하여 도회로 나가고 많이 적적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장모님, 어떻게 지내세요. 사위가 바빠서 전화도 제대로 못해서 서운하시죠?”
“서운이고 뭐고 요새 허리가 고장이 나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
지난주에는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도 빠졌잖여.”“그렇게 많이 아프셨어요.
교회에 빠져서 하늘나라에 제대로 가실라나 모르겄네요. 그나저나 식사는 어떻게 해 잡수세요?”
“겨우, 겨우 기어서라도 밥은 해 먹어야 살지 어쩌겄어.” “자식들은 멀고 우선 영감님더러 밥이나 좀 지으시라고
하시지 그랬어요.” “어이구 그 양반이 밥은 무슨 놈의 밥. 동네 노인회에서 청와대 구경 가자고 성화를 해대서
어제 서울 가셨어.” “아니 할멈이 이렇게 아픈데 내버려 두고 혼자 관광 가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영감님을 뭐 하러
여태 따라 사셨대유.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시지.” “글씨 말이여, 그랬으면 자네가 그리 착한 마누라 못 얻었겄지.”
“착하기는 뭐가 착합니까. 갈수록 속 썩여서 물릴까 하는데.” “물려 줘야제. 데려갈 때 모냥으로만 해서 보내면
왜 안 물려 줄까. 요새 같으면 딸 있는 대로 다 물려다 놓고 싶은 심정인디.”
“그나저나 명절에 사위가 가면 굴비 굽고 햅쌀밥 해서 대접하려면 허리가 빨리 나아야 할 턴디.”
“명절에나 딸이 오면 누워서 밥 좀 얻어먹어야지 서두를건 뭐여.”
가끔씩 전화로라도 외로움을 훑어 낼 수 있는 내 나름의 빗질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나셔서
그런 말씨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사위의 전화를 무척이나 반갑게 받으셨는데.
인간은 대화 속에 산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언어 속에서 산다.”고 말한다. 눈짓이든 몸짓이든 다정한 대화든 간에
사람은 마음이 통하고 감정이 통해야 사는 맛이 난다. 사람이 모여 산다고 해서 다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대화가 많을수록, 서로의 가슴에 감정의 출렁임이 많을수록 삶은 그만큼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이다.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얼크러진 것을 풀어 주며, 타이르고 나무라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며 함께 나누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맥박처럼 고동치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그것이 어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뿐이랴,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기능을 주신 하나님도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다가오는 분이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창세기 3장 8절).
별이 빛나는 밤에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 함께 걸으며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되리라”고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형에게 죄를 짓고 도망가는 야곱을 따라오시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고 하던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장 18절)고 초청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 대화로써 진리를 설명하시던 분이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신념에서 깊은 자만에 빠져 있는 니고데모를 밤중에 만나 중생의 도리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시던 분이다.
그런가 하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당시의 엄격하던 성별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말을 걸어오시던
분이다.동네 여인들의 입방아와 눈총을 피해서 아침이 아니라 한낮에 물을 길러 온 여인에게 다가가 미친 듯 살아온
그의 인생을 말끔히 청소하고 정리하신 분이 그리스도이다.
대단한 기대를 품고 따랐던 스승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는 두 제자가 터덜터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끼어들어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분이 그리스도이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갈 길이 명료해지며, 뒤엉키고 꼬였던 인생의 숱한 의문이 머리를 빗질하듯 그렇게 가지런해졌다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우리는 지금도 매일의 생활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 심정을 펴놓는 것이다. 우리의 슬픔과 기쁨, 마음의 고민과 갈등을
마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털어놓듯이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자상한 아버지처럼 우리의 사정을 듣고
응답을 주신다. 그래서 진실한 기도는 우리의 혼란스럽고 당황스런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는 영혼의 빗질 같은
것이다.이다음 언제쯤 다시 남도에 가면 일부러라도 담양 장에 들러 주황빛 고운 얼레빗, 참빗 한 쌍 사다가 몇 올 남지
않은 어머니의 머리 한번 빗겨 드리고 싶다. 아내나 딸들을 시켜도 괜찮겠지만 나라고 머리 빗질 한번 못해 드리랴.
옛 얘기 나누며 고향의 추억 한 바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살아가는 이야기]#31 - 얼레빗과 참빗^|작성자 에덴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