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나의 지나간 세월의 팔할은 여자를 기다리느라고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렸을 때 고향집은 내장산이 있는
정읍까지 꼬박 삼십 리가 떨어진 곳이었는데 어머니는 장에 가시는 날 어쩌다가 한 번씩 주먹만 한 눈깔사탕을 사
오시는 일이 있었다. 길쌈이 주 수입이던 시절에 그 시골에서 무명베 한 필 쪽진 머리에 이고 장에 가시면 하루 종일
뒷동산에서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장으로 가는 길 쪽에는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있고 그 산등성이가 말 잔등처럼
평평한데 듬성듬성 나 있는 소나무 사이로 보일락 말락 오솔길이 있었다. 엄마는 이웃집의 광주댁, 숙댕이댁, 시암
(샘)골댁 이렇게 한 무리가 되어 머리에 보퉁이 하나씩 이고 그 솔밭 샛길로 장에 가셨다. 논둑길로 십 리나 되는
학교를 다녀와서 오후 내내 그 오솔길 언덕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봄날이면 긴긴 해에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이 없나
해서 삘기며, 연한 찔레순, 때로는 진달래꽃도 좋은 군것질거리였다. 굵은 설탕덩어리가 듬뿍 붙은 무지개 색 눈깔
사탕을 꿈꾸며 해가 지도록 그 뒷산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멀리 초등학교 뒤 성황산 꼭대기 정자나무에 붉은 해가
걸려 하늘이 그렇게 아름답던 저녁놀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집집마다 솔가지를 태우는 저녁 연기가 마을 위에 차일
처럼 떠 있는 저녁이 와도 엄마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낮부터 떠 있던 반달이 조금씩 얼굴색이 나고 외로운
별들이 하나 둘 친구가 찾아와 한층 정다워질 때도 아직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어디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 혹시 엄마가 다른 길로 집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네 고샅을 지나 집까지 한숨에 와
보지만 아직 집은 썰렁한 채 그대로이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눈물만 흐른다…”
슬퍼서 눈물이 아니라 슬픈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왜 눈물이 흐르지 않으랴. 이제 다시 장에 가는 길로 마중가기는 무섭고
이런 저런 동요를 부르는 사이에 달빛 가득한 앞마루 기둥에 기대어 잠이 든 적이 몇 번이었는지 다 셀 수 없을 것이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또다시 이 여인을 기다리는 일은 시작되었다. 신혼시절에 우리는 고추장으로 잘 알려진
순창에 살았고 아내는 그곳에서 백 리나 떨어진 광주에 직장이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어서 별이
아직 총총한 새벽에 나가면 머리에 달빛을 이고 돌아오는 날이 허다했다. 30년 전 시골 버스 정류장은 자갈만 깐 바닥이
냄새와 먼지 범벅이었지만 붉은 흙먼지를 뒤집어 쓴 버스에서 그 새댁이 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버스 정류장에
붙은 과일가게에 윤이 나도록 잘 닦여진 홍옥 사과가 전등불에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아내가 내리면 그 사과 몇 개 사서
두어 개씩 맨손에 나눠 들고 가리라고 생각을 닦고 있었다. 하루는 기다리다가 잠깐 화장실에 갔는데 초라해 보이는
시골 노인이 볼일을 보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러자 화장실에 왔던 두 청년이 그 노인을 막아서며“할아버지 여기서 동계를 가려면 어떻게 가지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노인이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미처 바지춤을 간추리지도
못하고 도망하면서“어허 별사람들 다 보겄네. 오줌 좀 쌌다고 돈을 내라니, 별 사람도 다 있네, 허어참.”하며 흘끔 흘끔
돌아보며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동계를 가는 길을 물었더니 입 모양만 보고 돈 내라는 줄 알고
겁을 잔뜩 먹고 달아나는 모습이 하도 우스워서 그 청년들과 함께 배꼽을 잡고 웃다가 길을 가르쳐 주고 나니 기다려도
오지 않던 그 새댁이 집에 갔다가 나를 찾으러 다시 온 적도 있다. 그렇게 30년을 살았는데 이제 두 딸이 애를 태운지가
또 몇 년인가? 학교에서, 교회에서 만날 사람은 그리 많고 할 일은 그리 많은 건가.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하면 아직
인사동이란다. 이 밤중에 아직 인사동이 다 뭐냐고 야단을 치면 종로에 다와 간단다. 10분쯤 있다가 다시 전화를 걸면
인사동에 깜빡 잊은 게 있어서 다시 왔단다. 30여 분 지나서 전화가 왔다. 이제 종각에서 전차타려고 한단다.
“ 근데요, 아빠.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20분쯤 지나서 우산 좀 가지고 회기역으로 나오시면 안 돼요?”
어쩌겠는가! 기왕에 그렇게 다 보낸 세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