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유감
K는잘 끓인 된장찌개 맛 같은 친구다. 그를 만난 지가 30년 하고도 몇 해가 더 흘렀으니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보냈다.
대학 시절에 처음 만났을 때는 그에게 예쁜 여동생이 많았는데 갈 때마다 밥만 실컷 축내고는 그들에게 흔한 머리핀
하나 사 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가난한 오빠 친구였으니까. 이 친구는 나보다 두어 살 아래이면서도 검은 머리
하나 없이 백발이어서 어딜 가든지 대접은 자기 혼자 다 받는다. 같이 식당에 가면 언제나 그의 앞으로 먼저 음식이
나온다. 돈은 거의 내가 내는데도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 중 하나가 이 친구하고 짐 싸들고 주유산천하는 일이다.
그래서 전국의 강과 바닷가 중 함께 안 가본 곳이 얼마 안 될 정도다.
서너 해 전이던가. 한 이틀 휴가를 내서 춘천호에 간 일이 있다. 호수 위에 별들이 놀러와 하늘 위의 제 짝과 눈을
마주치느라고 반짝거리는 밤이었는데 한밤중쯤 되어서부터 구름이 몰려와 별빛을 지우고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후두둑 내리기 시작한 비가 장대비가 되어 밤새 퍼부어 대는 것이었다. 소나무 숲 속에 봉고차를 세워 놓고
의자의 목 받침을 빼 내고는 평평하게 편 다음 나란히 누워 밤새 빗소리를 들으며 지난 세월에 만났던 사람들 흉을
보는 일도 여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잠이 들면 이 친구 코 고는 소리는 봉고차 시동거는 소리로는 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천둥 번개 때문에 귀가 멍멍해서 망정이지 보통 때는 도무지 나란히 잘 수가 없어서 조금이라도
코 고는 소리에서 멀어지려고 나는 항상 그의 발꿈치에 머리를 두고 잔다.
밤새도록 천둥 번개가 치고 수상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우지끈 뚝딱 부러지는 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으스스하게
하는 캄캄한 숲 속이지만 이 친구의 든든한 체구며 천둥을 능가하는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강원도 산중 날씨는 변덕도 많아서 새벽녘이 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혼비백산 도망갔던 별들이 다시
돌아와 호수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아아 호숫가의 이 맑은 새벽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몇 달동안 꿈꾸던 그림인가?
별빛이 희미해져 가는 호수 위로 먼동이 터 오는 비온 뒤의 새벽이라니.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호수는 차갑도록 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호숫가로 내려가 낚시나 한번 담가 볼 양으로 길을 더듬어 내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벌써 물가에 서성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멈칫거리는데 그 사람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호숫가에 놀러 온 사람인 것 같아 수인사를 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내 뒤를 따라 저만큼 엉금엉금 내려오는 K를
보았던 모양이다. 이 사람 하는 말이“저분은 누구신가요, 아버님이신가요?”당황한 건 나보다 오히려 뒤에서 따라오던
K였다. 아버님이라니! “아, 그게 아니고 제 친굽니다. 머리색깔이 좀 희어서 그렇지.”“아, 그런가요. 낚시 자리로는 여기가 이 호수에서 최곱니다. 엊그제도 이 자리에서만 준척으루다가 한 30수 했지요.”“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보아하니 낚시를 오신 것 같지는 않은데.”“아, 예 저는 저 건너 나무 밑에서 막 하나 치고 요양을 좀 하고 있지요.”
그리고는 뒤따라 온 K와 수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서로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하는 모양이었다. 날이 점점 밝아 오면서 살펴본 그의 행색은 보통 사람은 아니고 알콜 중독자로 숲 속에 살면서 낚시꾼들에게 친절을 베푼 댓가로 술이나 음식을
나눠 먹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가 자기 움막으로 건너가더니 우리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자기 동료와 떠드는소리가 물을 건너 들려왔다.“ 형님 좀 일어나소.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 가지구설랑은 나이도 몇 살 안 먹은 것이 머리터럭만
허예개지구 사람 놀래키네.” 그 이후로 그는 나에게 까딱하면“머리터럭만 허예개지구 사람 놀래키지 말라.”는 구박을 참
많이 받고 살았다. 이번에 첫 손주를 보았다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니 아무래도 예쁜 옷이라도 한 벌 사다 줘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