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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

은빛지붕 2023. 8. 5. 00:04

 

 

여러 해 전 구제 금융 시절 제법 늦은 가을 밤에 서울역 근방을 지나가다가 지하도 여기저기에 신문지 한장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깔고 누워서 다른 신문지 한 장을 덮고 자는 이들을 보고는, 도대체 신문지 한 장이 추위를 가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나 하는 궁금증 때문에 마당에 놓인 평상 위에 신문지 한 장을 덮고 누워 본 적이 있다.

없는 것보다는 약간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계동 롯데 백화점 근방의 작은 교회에 다니시는 정 장로님은

노숙 자들을 위해 애를 많이 쓴다. 매주 예배시간마다 모이는 삼사십 명의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챙겨 주는 교회

집사들의 정성도 고맙거니와 정장로님은 매번 오는 사람들에게 꼭 2천원씩을 주어 보낸다.

그것도 하루에 40명씩 한달에 너댓 번씩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이 일을 시작허문서 점심 값을 아끼기로 혔지요. 서울역 어디 가면 노숙자들을 위해 점심 한 끼에 100원씩

받는 곳이 있다길래 내가 한 끼 점심 안 먹으면 이분들 40명은 점심을 먹을 수 있겄구나 허는 생각이 들지를 안겄어요.

그래서 점심 안 먹고 하루 두 끼만 먹은 지 일 년 남짓 되는데 체중 감량도 되고 정신도 더 맑아지고 그리 좋을 수가

없는 기라요.”목소리가 유난히 가늘고 느릿한 말씨에 물기가 깊이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가 허는 장사라는 게 별거 아니고 혀서 뭐 좀 더 도움될 일이 없나 허고 있는 판에 하루는 가게 옆에 울타리 쳐 놓은

빈터가 있는 게 아닙니까. 아마 시청에서 무슨 건물 지으려고 골라 놓은 거라고도 허고. 하여간 지난 봄에 좀 허술한

울타리를 넘어가서 냅다 호박 구덩이를 한 백여 개 팠다 아닙니까. 틈나는 대로 퇴비를 사다 넣고 호박을 심었지요.

 

떡잎이 넙죽허게 올라오고 봄비가 한번 내리고 나면 호박순 뻗는 게 보이는 듯 했지요. 여름이 되어서 이제 막 호박꽃

피면서 윤기 나는 애호박이 열리려고 허는데 어느 날 난데 없이 가죽잠바를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더니‘당신이 여기다

호박 심었느냐’고 묻는데 여간 살벌헌게 아니더라구요.‘그렇다’고 했더니 누구 허락받고 심었느냐. 당장 뽑아 내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이거 보통 낭패가 아닌기라요. 그래 사정을 했지요. 이 늙은이가 이러저러하게

노숙자들에게 밥을 먹여야 하는데 돈은 없고 점심을 굶어도 모자라고 해서 여기 심은 호박 한 개에 백원을 받으면

밥 한끼, 오백원을 받으면 밥 다섯 그릇 이리 계산해서 심은 깁니다. 지발 뽑지는 말아 주이소. 수 백 명 밥줄이 달린깁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꺼정 나왔는지는 몰라도 이 양반들이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더니‘할아버지만 봐드리는겁니다.

절대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가더라구요.

그때 정말 십 년 감수했는데 그러나 아직도 법보다는 인정이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들에게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는 비도 유난시리 많이 내리고 호박이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워낙 포기 수가 많다 보니 매일 한 바구니씩은 꾸준히 나오더라고요. 그걸 따다가 제 사무실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지 손으루다가 써서 광고를 하나 써 붙였지요. ‘어려운 노숙자를 위해 호박을 팝니다. 바로 건물 앞 빈터에서 재배한 것입니다. 세 개에 천 원짜리 한 장입니다.’그런데 작은 상자에 후하게들 넣어 주시고 호박이 모자라서 못 팝니다. 아직도 세상이 따뜻한 거지요” 수고한다는 말과 함께 손을 잡아드렸더니“우리도 다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요”

라고 대답하는 그분의 얼굴에 유난히 주름이 많이 패어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제 때에 다 따지 못해서 한 백여 개가 잘 익어가고 있구먼요. 가을에 한 번 찾아 뵐 테니 한 덩거리만 팔아 주세요.”
올 겨울이 다가기 전에 얼른 호박죽을 쑤어 이웃 할머니들에게 한 그릇씩 대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