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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쟁 하려는가?

은빛지붕 2023. 8. 31. 00:01

이미 인간은 경쟁을 하지 않으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아예 살맛을 잃는다. 왜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흥미를 잃고,

경쟁을 하면 의욕과 활력이 고조되는 것일까? 인간에게는 흥미를 추구하는 심리가 있는데, 그 흥미 중 하나가 바로

경쟁에 의해 도출된다는 것이다. 이 경쟁심리는 사람에게 의욕과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심리적 긴장과 위축과 갈등을

겪게도 한다. 또한 승리의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패배의 자괴감을 갖게 하여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을 다양하게

만든다. 어떻든 인간은 끊임없이 경쟁하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삶의 원리가 경쟁원리를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고,

교육 제도까지도 이 경쟁 원리의 지배를 받으며 스포츠를 경쟁의 꽃이라 부르고 있다.

그럼 왜 경쟁하는가? 흥미와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쟁 과정에는 흥미만이 존재하지 않고 부정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경쟁을 추구하는 심리에는 경쟁에서 승리할 때 오는 그 쾌감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부정적

요소를 한꺼번에 삼켜 버린다. 그래도 인간이 경쟁하는 가장 큰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적자생존의 진화론적 사고방

때문일 것이다. 우등한 것은 살아남고 열등한 것은 도태된다는 것은 결국 경쟁에서 지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하고

극단적 생존원리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인류는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상생적 원리가 아닌, 서로 적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건 도박을 통해 스릴을 느끼며 그 속에서 울고 웃도록 하는 기형적 생활 방식을 만들어 냈다.

결국 이 논리가 생활화되었고 그것은 사회적 원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이 경쟁을 비논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구조는 좀 더 극명하게 경쟁을 유도하고 있고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경쟁의 최후 승리자를 영웅시하고

모델링하고 있다. 이제 경쟁의 원리는 인간의 삶의 불가피한 필요악이 된 것이다.

이 경쟁원리가 피할 수 없는 사회구조요 생존 원리라면 우리에게는 분명히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경쟁 원리가 잘 다듬어지기만 한다면 지금 상태보다 훨씬 여유 있고 풍요로우며 윤리와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를 이룩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바람직한 경쟁 사회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해본다.


제대로 경쟁하려면
 첫째, 그 경쟁의 과정이 정당하며 윤리적이어야 한다. 서기 66년 로마 네로 황제는 올림픽에 참가하려고 무장한 군인

5천 명을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했다. 올림픽 참가 선수 네로의 태도는 처음부터 위압적이었다. 주눅이 든 심판들은 거의

모든 시합에서 네로에게 최고점을 주어 네로는 당시 올림픽 종목이었던 시낭송, 연주, 달리기, 던지기 부문에서 모

우승했다. 마지막 경기인 수레 경기에서 네로는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달리다가 중도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선수들은 일제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수레를 세웠고 가까스로 수레에 올라탄 네로가 당연히 수레 경주에서도 우승하여 올림픽 사상 유일하게 혼자 전 종목 우승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관중은 아무도 그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우리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하지만 이것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다. 오늘날 수많은 승리자가 있어도 박수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경쟁 과정이 무시되고 목적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적 경쟁이 아닌 절대적 경쟁이어야 한다. 물론 경쟁이라는 말이 이미 상대성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축구 경기와 같이 상대의 노력을 방해해야 내가 이기는 경쟁 방법이 아닌, 골프처럼 상대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량을 소신껏 발휘하는 경쟁 방법을 말한다. 남이 아닌 자신과 경쟁하자는 것이다. 상대를 적으로 하는 싸움은

무서운 후유증을 가져온다. 그 일례로 한국의 교육 제도 중 내신성적 평가 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제도는 같은 학우를

적으로 하여 공부하게 하는 가장 저급한 교육 제도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나름대로의 주관적 재능을 발휘하고

개발하도록 하는 교육이 아니라 상대를 눌러 자신의 위치를 고양하는 원시적이며 동물적인 경쟁 논리이다. 

바로 이런 잘못된 경쟁 논리의 교육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이기주의와 한탕주의와 서로 간의 불신을 조장하는 병리적 

현상을 가져오게 하는 주원인이라고 본다.

 

셋째, 경쟁의 승리자는 겸손해야 한다. 승부의 세계는 언제나 역전될 수 있다. 암탉에게 잘 보이려고 싸우다가 패배한

수탉이 컴컴한 구석에 가서 숨었다. 이긴 수탉은 의기양양하여 높은 담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승리의 쾌재를 부른다.

바로 이 순간 독수리가 그 수탉을 낚아채 간다. 안전한 곳에 피해 있었던 진 수탉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암탉에게

구애할 수가 있었다. 승리를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길은 승리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이다.

 

넷째, 경쟁에서 진 사람은 패배에 굴하지 말고 그 패배에서 삶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한국의 김동성 선수는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금메달을 빼앗기는

불운의 스타가 되었다. 이 일은 김동성 선수뿐 아니라 한국의 온 국민을 분노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김동성은 실망하여 주저앉지 않았다. 그 후 약 2개월 후에 김 선수는 2002 쇼트트랙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전관왕을 차지하였다. 그가 따낸 6개의 금메달은 지난 2개월 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에게 

빼앗긴 금메달에 대한 값진 보상이었으며, 김동성 선수의 진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입증했다. 경기에 한 번 졌다고

인생에서 모두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김 선수가 깊이 깨달은 결과였던 것이다.


다섯째, 경쟁에서 지는 것도 이기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는 인생의 철저한 패배자요 실패자였다.

그는 오래살지 못했고, 후손이나 재산도 남기지 못했으며 많지도 않은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심지어 그는 사기꾼과 기만자라는 누명을 쓰고 굴욕의 십자가에서 사형당했다. 그는 인생에서는 철저하게 진 자였다.

그러나 예수만큼 승리한 사람이 있을까? 오늘날 예수만큼 유명한 이름이 있을까? 그분만큼 존경받는 사람이 있을까?

최고의 예술이 그분과 연관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이 또 있을까? 그는 완전히 지는 것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얻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경쟁해야 할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가장 큰 승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