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한다는 2
사랑을 치다가 사람으로 치는 경우도 있고, 사람을 쳤는데 사랑을 치는 경우도 있다.
사랑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로인해 내가 참으로 사람이 많이 되었구나하고 느껴질 때가많다. 한참 색칠하고 만드는 일에 빠져서
냄새 나는 갈치 상자를 주워다가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만들어 용감하게도 내 방에 들인 적이 있었다.
락스에 담궈서 몇 번을 말리고 씻고를 반복 했지만 나무에 베인 갈치 냄새는 나의 방을 커다란 갈치 상자로
느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대책없이 미쳤었는지, 환기를 시키고, 향수를 뿌리고
오만 궁리를 다해보아도 갈치 썩는 냄새는 더 짙게 베여드는 기분이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몇 해가 흐르고, 이제 내 방에서는 더 이상 갈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갈치 상자로
만든 화장대에서 은은하게 내가 쓰는 스킨 로션 냄새가 난다. 나는 어쩐지 내가 그에게 그 갈치 상자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돌아보면 정말 사람도 아니였던 것 같다. 내가. 그런데 그와 십년 가까이를
살면서 내게 질퍽질퍽 찌들어 있던 상한 진물들이 뼛속까지 마르고 조금씩 조금씩 옅게 한 겹씩
한 겹씩 은은하게 그가 내게 베여든 것 같다. 비록 갈치 상자가 되었지만 어떤 나무 조각은 무늬결이
예쁘고 매끄럽고 단단하다. 이제는 가까히 코를 대어보면 은은한 솔 냄새가 나는 나무도 있다.
옹이 구멍이 나 있는 것도 있고, 짙은 외피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옅게 나도 그에게 베여들어갔을까? 그는 한쪽 귀에 피어싱을 하고 눈썹을 문신 했다. 그리고 천이 너덜
거릴정도로 매고 다니던 가방도 바꾸었고, 내가 그에게 올 때 가지고 온 책들 중 여러 권이 그의 정신을
이루게 되었다. 그냥 그저 외로워서 어디라도 기대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에게 존경이라는 형태의 이전에
가져 본 적이 없는 좀 고귀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생겼다. 사랑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그로인해 된 사람, 내가 요즘은, 옹이 구멍 많은 갈치 상자 화장대처럼, 불완전하게 나마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로 느껴진다. 첫째로 말이 없어졌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게 내게 피부처럼 착 달라붙어 있던
거짓이나 허영, 객기, 얕은 취기들이 거의 다 사라진 것 같아 홀가분해졌다. 그것이 거짓말은 커녕 진실도
말을 더듬어서 잘 말하지 못하던 그에게 내가 받은 선물이다. 그는 나의 너무 오랜 성장기를 지켜보고 함께
하며 함께 아파해왔던 것 같다. 나의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은 일들을 그는 다 알고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말 없이 덮어주고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데 아둔한 나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가끔은 그와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결혼 할
때가 다 되었는데, 낯 뜨겁다 싶기도 한데, 이제는 그의 진짜 부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같이 사는게 결
혼이지, 내가 언뜻 말을 꺼내보면 그가 하는 대답이다. 나 또한 일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아, 하긴, 뭐..하고
지나치게 되기도 한다. 아직 봐줄만 할 때 드레스도 입고 사진도 찍고 하면 좋을텐데 싶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함께 십년을 살고 나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인간이랑 살면서 죽도록
개고생을 해보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해보고 원망도 해보고, 술 한 잔 되면 유리창에 한 쪽 구두를
던져서 박살도 내보고, 쌍욕도 해보고, 보따리는 열만번도 더 싸보고,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엔 자주 든다.
그는 내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심한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를 박박 갈며 코를 골며
방귀를 끼며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되어야 사랑하는 것이다. 잘 자라. 서방아. 나의 서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