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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하지 않은 천사

은빛지붕 2023. 10. 16. 00:04

 내 자식이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할 줄을 꿈에도 상상 하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여자에게는 아이까지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허락 못한다!”
“엄마가 아무리 반대해도 저희는 결혼합니다. 이번만은 엄마가 저한테 져 주셔야 합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온갖 고생 다하며 키운 자식이었다. 세상을 다 잃은들 이보다 더 슬플 수는 없었다.

생병이 절로 나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아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하루만 함께 지내보세요. 엄마가 이 아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저도 마음 바꾸도록 노력할게요.”
아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갔다.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눈이 유난히 까맣고,

볼살도 오동통한 남자아이였다. “할머니, 어디 아파요?” 아이는 마치 오랫동안 보아 왔던 사람 대하듯 편안하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라는 말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지만 녀석의 행동은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머리 아프면 호 해 드릴게요. 그러면 안 아파요.” 아이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는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귀찮으니까 혼자 놀아라.” 차가운 내 말에 아이는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물어 왔다.

“할머니 많이 아파요? 그럼 나랑 병원에 가요.” 아이는 내가 아파서 짜증을 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실로 나갔던 아이가 이내 들어와 내 앞에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할머니, 이거 버릴 거예요?” 아이가 내민 것은 마트에서 발행한 포인트 적립 카드였다.
“버릴 거야.” 내가 대답하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조카며느리가 병문안을 온 것은 오후였다. 조카며느리는 다음 달이 산달이라 배가 많이 불렀다.
“애가 참 귀엽게 생겼네요. 붙임성도 좋고요.” 그간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조카며느리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아이가 조카며느리에게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줌마는 몇 살짜리 아이를 낳을 거예요?”
“너는 몇 살짜리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니?” “다섯 살짜리는 너무 말썽만 부려요. 그러니까 일곱 살짜리 아이가 좋아요.” 그 말에 조카며느리는 물론이고 나도 웃고 말았다. 아이는 조카며느리한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아줌마는 카드 안 버려요?” 아이 말에 조카며느리가 다 쓴 국제전화 카드를 건네주었다.  “그 카드로 뭐할 거야?”
 조카며느리가 묻자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은행에 가서 돈 찾아서 할머니랑 병원에 갈 거예요.”
 아이는 카드만 있으면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아픈데도 병원에 안 가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아이의 그 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쿡 찔렀다.
조카며느리가 돌아가고, 나는 약을 먹고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어떤 기척에 눈을 떴다. 놀랍게도 아이는 바로

내 앞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작은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차마 아이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작은 몸에서 풍겨 나오는 따뜻한 향기, 그것은 차디차게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여 놓기에 충분했다. 꿈을 꾸는 걸까,

아이가 몸을 뒤척거렸다. 나는 가만히 아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다독다독 가슴을 다독여 주었다.

아이는 새큰새큰 단잠에 빠졌다. 나는 잠든 아이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다 잃었다고 생각한 세상이 

다시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한 내게 하늘이 어린 천사를 보내 주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