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하얀 쌀밥
“할아버지이~, 할머니이~.”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앳된 소리가 밭고랑을 지나 땀으로 뒤범벅이 된 내 귀에 들려왔다.
“흥규야! 유신아!”기쁘고 반가워서 품에 안고 몇 바퀴 돌다 보니 땀이 더 흘렀다. 한여름 밤은 즐겁다. 평상에 다 모였다.
묵찌바, 지는 사람이 노래를 했다. 몇 번 하지 않았는데 밑천이 다 떨어졌다. 얘들아, 옛날 옛날 할아버지가 흥규 너만
할때의 이야기인데 잘 들어 보렴. 아지랑이 조용히 피어나는 따뜻한 양지마을 하늘만 빼꼼이 숨이 트이는 골짜기
중에서도 작은 골짜기인 가난으로 풀칠한 작은 마을이 있었지. 어린 나는 양지 바른 곳에 앉기만 하면 졸음이 왔다.
창자는 등에 가서 붙었나 보다. 어제 뜯어온 쑥도, 송기도 다 먹고 없다. “영준아, 니는 오늘 아부지한테 갔다오니라.
”4형제 중 둘째 형님이 제일 크고 건강했다. 그러니 밥도 많이 먹었다. 둘째 형이 머슴살이 간 곳은 20리쯤 떨어진
구사리라는 동네였다. 그렇게도 가기 싫다는 머슴살이를 보냈으니 두 달도 못 채우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새경으로 쌀 한 섬을 미리 받았으니 한 해의 농사를 책임져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대신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개나리 봇짐을 진 아홉 살짜리 막내 아들인 나는 소나무가 빽빽한 20리 산길을 혼자 걸어가는데 몹시도 무서웠다.
부시럭거리는 소리, 새 소리, 바람에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 까욱 까욱 까마귀 소리, 요란한 개울물 소리, 내 머리끝은
소나무가지에 매달렸는지 꼿꼿이 섰다. 무섭다, 무서워. 금방이라도 무엇이 나올 것 같았다. ‘집으로 되돌아갈까?
아이다 고마 고생하시는 아부지 옷을 갖다 드려야제.’기를 쓰고 걸었다. 돌부리에 채여 그만 넘어졌다.
정강이에서 피가 났다. 그러나 아픈 줄도 모르겠다. 숨을 턱에까지 올리고 빨리 걸었다. 드디어 산길을 지나고
신작로가 나왔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몹시 아프다. 한참을 걸어가니 동네가 보였다. 기와지붕이 태반인 부자
동네였다. “계시는기요? 예에?” “누고? 니가 누고?” “양지리에서 아부지 옷 가지고 왔심더.”
“아, 그래 저 사랑방에서 쪼매마 기다리래이.” 머슴이 거처하는 방이라 담배 냄새, 쾨쾨한 냄새가 났지만 아부지
냄새라서 싫지는 않았다.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부지가 나무짐 내리는 소리였다.
“아부지예.” “오냐 니 왔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니 오매는 잘 있나? 니 성 소식은?” “없심더.” 점심 밥상이 들어왔다. 하얀 쌀밥이다. 구경도 못해 본 쌀밥이다.
나의 눈에는 흰쌀밥뿐이었다. 아부지 밥그릇이나 내 밥그릇이나 높이가 똑같았다. 게눈 감추듯 한그릇을 비웠다.
아부지는 반도 안 드시고 내 밥그릇에 부었다. 옆도 안 돌아보고 다 먹어 버렸다. 등에 붙었던 창자가 배로 왔는지
배가 불렀다. 부자지간에 오래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아부지는 일하는 머슴이니까.
“영준아, 나는 나무하러 가야덴께 니는 고만 집에 가그레이.” “저거시 얼매나 배가 고팠을꼬. 쯧쯧.”
곰방대 담배 연기 휘날리며 지게 지고 아부지는 산으로 가시면서 “영준아, 잘 가거래이.”
“야, 아부지도 잘 계시쇼.” 나는 신작로 길로 내려오면서 두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이리 닦고 저리 닦으면서 외치고
또 외쳤다. “나는 부자가 될 거야, 배고프지 않은 부자.” 내가 밥술이나 먹을 때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셨다.
아버지에게 뺏어먹은 그 하얀 쌀밥 한 그릇, 갚아 드리지 못해 몹시 가슴 아프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