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시원한 여름
계곡물에 발을 담그자마자 무릎까지 시려왔다. 골짜기의 바람이 서늘했다. 옆 옹달샘에서 길어온
물을 마시니 속까지 차가워졌다. 시원한 여름이다. 파도타기는 늘 스릴 만점이다. 예상치 않은 곳에,
예기치 않은 때에 물에 부딪혀 휩싸인다. 코가 찡해진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끼리도 어깨 걸고 점프
하며 파도를 타면 바다를 안는 기분이다. 시원한 여름이다. 동굴 안은 그 분위기부터 스산하고
으스스하다. 종유석 모양도 괴기하고 안쪽에서부터 휭 하니 불어오는 바람이 을씨년스러워 더위
식히기엔 그만이다. 박쥐 떼의 기습까지 받으면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시원한 여름이다.
고추 밭 잡초를 뽑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린다. 저 멀리서 머리에 새참을 이고 손엔
국 주전자를 들고 부지런히 걸어오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 거리에 시간을 걸고 누가 풀을
많이 뽑아내나 내기를 하면 능률이 10배나 뛰어오른다. 비록 더위에 힘이 부쳐 숨이 넘어갈 듯해도
말이다. 끝선 밭이랑을 넘어서자마자 후다닥 달려 50여 미터 개울로 뛰어든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웃옷을 벗어던지고 뭉게구름 걸친 미루나무 그늘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할라치면 온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렇게 진미일 수가 없다. 시원한 한여름이다. 친구들이랑 멱 감고 원두막에서 먹는
수박맛, 재잘대다 갓 쪄온 옥수수를 먹는 기분,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어둠이 여름을 덮을 즈음,
나머지 더 재잘대다가 잠들던 어린 시절, 참 시원한 여름이다.에어컨 자동차가 웬말인가. 자전거
가 유일한 자가용이었고, 소리 좋고 기동력 센 경운기가 단체용 승합차였다. 대학 시절, 하기 봉사대
단원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젊음을 그렇게 뽐냈다. 돌아오는 길 경운기 뒤에 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불러대다 경운기 주인 아저씨 텃밭에서 딴 오이를 어적어적 씹어 먹었다.
참 시원한 여름이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있었다. 몹시 가난했던 시절, 식사는 늘 빵 한 조각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이해로 극복한 후 안정된 생활에 들어섰고 마침내 결혼 40주년 금혼식,
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서 부부는 무척 행복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하루 종일 손님을 맞이하느라 지쳐 있었으므로 간단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잼을 발라 나누어 먹기로 했다.“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으니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는
구려.”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할아버지는 지난 40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할머니에게 빵의 가장자리를 잘라 내밀었다.
할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몹시 화를 냈다“. 역시 당신은 오늘 같은 날에도 내게 두꺼운 빵 껍질을
주는군요. 40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난 날마다 당신이 내미는 빵 부스러기를 먹어왔어요.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애써 참아왔는데…,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도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내 기분이 어떨지 조금도 헤아릴 줄 모르는군요.”
할머니는 분에 못 이겨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할아버지는
몹시 놀란 듯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친 뒤에야 할아버지는
더듬 더듬 말을 꺼냈다.“ 여보, 당신이 진작 이야기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난 정말 몰랐소.
하지만 여보,바삭바삭한 빵 끄트머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소.”
속 시원한 여름 이야기이다.시원한 과일과 채소가 여름을 시원하게 한다. 산과 바다도 시원하다.
그런데 속까지 시원하게 하는 여름은 추억의 그리움에 있다. 땀과 보람이 깃들어야 속이 시원하다.
감동이어야 하고 마르지 않는 사랑의 울림이어야 속이 시원하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처럼. 이 속 시원한 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