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먹는다는 것

믿거나 말거나
오래전에‘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라는 미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소개한 적이 있다.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 시가 되도록 무려 열다섯 시간 가까이를 딱딱한 교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마 서양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불가사의로 보인 모양이다. 미국 아이들이 아홉 시쯤 느긋하게 학교에 가서 해 지기 전에 일찌감치 집에 돌아오는 것과 굉장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쪽 아이들이 매우 활기 있게 수업을 하는 반면 우리 아이들은 잠이 부족해서 수업시간에도 대부분 졸거나 아예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도 세 아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뒷바라지하는 일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학교가 먼데다가 버스 노선이 집 앞에 닿지 않기 때문에 매일 아내가 아이들을 학교까지 실어 나르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깜깜한 새벽부터 서둘러야 아이들이 제시간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잠이 덜 깬 아이들을 몇 번씩 야단을 쳐서 겨우 깨워 놓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눈이 감겨 비틀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녀석들에게 도시락을 두 개씩 들려서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골목으로 쫓아 보낸다.
새벽에 가끔 시내버스나 전철을 타면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그 붐비는 차 안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본다. 정말 공부가 되기는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시도 손놓을 수 없는 조바심때문인지 모르지만 두꺼운 안경 너머로 단어를 외우거나 문제집을 읽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달리고 집에 오면 금방 자는 게 아니다. 또 숙제를 해야 한다.
그렇다 보면 제대로 양말 벗을 틈도 없이 책상머리에 쓰러져 자기 일쑤다. 그런데도 이튿날 또 새벽같이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 것은 여간 독한 맘을 먹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시험 때가 되면 아이들의 처지는 한층 더 초조해진다. 성적이 조금만 떨어졌다 하면 온 집안 식구들의 얼굴색이 변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대학에 못 들어가면 세상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학생 본인이나 부모의 안달은 깊이를 모른다. 그런 아이들이 견디다 못해 성적을 비관해서 꽃다운 생을 마감하는 학생이 있다. 오늘날 이 나라의 학생들은 이렇게 공부에 초죽음이 되어 있다.
써먹는다는 것
사람들은 자식들을 좀 더 잘 써먹기 위해서 그 고생을 감수하며 공부를 시킨다. 그렇게 공부를 시키다가도 조금만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당장에“그 따위로 공부해서 어디다 써먹겠니!”라는 말이 튀어나온다.“아무짝에도 써먹을 데가 없는 녀석”이라는 말은 상대를 불학무식하고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못한 놈팡이나 남에게 피해만 주는 해충과 같은 존재라고 몰아붙이는 말이다. 욕 중에서도 아주 질이 나쁜 욕이 분명하다.딸네 집에 온 친정어머니가 한시도 놀지 않고 손을 움직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무리 딸네 집이지만 써먹을 데 없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란다. 제발 좀 가만히 앉아서 쉬라고 해도 아기를 봐주거나 청소를 하거나 해서 밥만 먹고 놀기만 하는 노인네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것은 나이가 많아도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여인들이 자신의 외모를 예쁘게 보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써먹을 데’와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꽃이 그러하듯이 어떤 여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이 곧 써먹을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가치가 없어질까봐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는 해석이다.그래서 써먹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존재의 부담이라고 일컫는다. 써먹되 좀 더 가치 있게 써먹을 데가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께서 지상생애를 거의 마쳐가는 어느 날 제자 둘을 건넛마을로 심부름을 보내셨다. 남의 집 마당에 매어 있는 나귀새끼 한 마리를 다짜고짜 끌고 오라는 것이다.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누가 묻거든“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일러 보냈다. 마침 나귀가 있어서 풀어 오려니까 아니나 다를까 주인이 득달같이 달려와 왜 남의 나귀를 허락도 없이 끌고 가느냐고 따졌다. 그래서 예수께서 일러 주신 대로“주께서 쓰시겠다 하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나귀 주인은 아무 말도 없이 끌고 가라고 허락했다.그 당시 나귀는 예루살렘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아주 쓸모가 많았다. 샘에 물을 길러 갈 때도 나귀의 등에 물통을 싣고 갔다. 장을 보러 갈 때도 나귀 등에 양쪽으로 바구니를 얹어놓고 과일이며 곡식을 싣고 갔다. 어린 아기를 태우고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소변을 성밖으로 퍼내는 일에도 나귀가 사용되었다.
그런 나귀를 예수께서는 매우 특별한 행사에 사용하셨다. 예수를 등에 태우고 왕처럼 행차하는 길에 사용된 것이다. 그날 거리에는 구름처럼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죽었다가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그 나귀의 고삐를 잡았고, 절름발이였던 사람이 행렬 앞에 서서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며 벙어리였다가 혀가 풀린 사람이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마태복음 21:9)고 외쳐 대는 찬송 소리가 메아리쳤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한복음 12:13)라는 칭송도 들렸다.아마 그 나귀의 주인은 그날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기른 보잘것없는 나귀 한 마리가 저토록 영광스럽게 쓰이는 것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았으랴. 가슴이 두방망이질하지 않았으랴.
천명(天命)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하는 일에 대한 진정한 긍지와 보람은 누군가 존귀한 사람이 자기를 사용한다는 데 있다. “대통령 욕하지 말아라. 지금이라도 당장 대통령이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면 당신은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갈 것이다.” 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존귀한 사람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그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어느 가정주부가“이웃집 아무개 엄마는 외제 차에 밍크코트 입고 시도 때도 없이 외국으로 돌아다니는데 나는 허구헌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어이구 지겹다 지겨워!”이런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그 집안 꼴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주부가“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의 주부로 세우셔서 가족의 건강을 지키고 가장 행복한 가정을 꾸릴 사명을 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그 가정은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이웃의 구멍가게 주인이“어이구 내 팔자야, 날이면 날마다 이 콧구멍만한 가게에 틀어박혀 숨도 못 쉬겠구나. 어떻게든 싸구려 물건을 비싸게 팔아서 돈이나 벌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하지 않고“하나님이 이 가난한 골목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더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사서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여기 쓰시는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의 표정이 얼마나 밝아질 것이며 동네 사람들이 그 가게를 얼마나 좋아하게 될지 보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다.
정치인도 다를 것이 없다. “내가 그동안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들인 공력이 얼마인가. 재산을 없애고 손에 멍이 들도록 악수를 하고 목이 쉬도록 상대를 헐뜯고 비리를 캐내서 외쳐댄 덕에 내가 여기에 오르지 않았는가? 드디어 올라왔으니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이 도대체 어찌되겠는가? 그러나“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든 백성이 더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 쓰시기 때문에 분골쇄신 보답해야겠다.”는 엄숙한 사명감을 지닐 때 백성의 앞날에 광명이 비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천명(天命)을 가슴에 새기고 일할 모든 공직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