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간의 벽, 대화로 풀자
며느리!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며느리라는 존재는 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왜‘고부갈등’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갈등을 겪으며 살까. 세상 모든 시어머니 및 예비 시어머니는 한결같이‘나는 며느리에게 잘해 줄 것이며 그리고 지금도 잘해 주고 있다.’‘절대 시집살이라는 건 시키지 않을 거고 안 시키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위 현실은 어떤가. 시어머니가 하는 말, 예비 시어머니의 각오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와 다른 며느리 개성을 인정해 주어야
무릇 갈등에는 양쪽에 문제가 있게 마련. 나 자신도 시어머니로서 시어머니 쪽 문제를 나름대로 둘러보고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이 있다. 그것은 갈등을 일으키는 두 가지 원인이 시어머니 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시어머니의 교만한 마음, 두 번째는 시어머니인 나 자신과 며느리가‘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며느리의 개성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며느리를 들인 시어머니는 부득불 나하고 다른 저애들을 기어이 내 식, 내 방법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내집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고부간에 최초 갈등이 여기부터 시작된다. 나를, 더구나 그 어려운 시절을 이기고 가정을 이만큼 이룩해 놓은 시어머니를 왜 존중하고 따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시어머니에게 승복하지 않는 며느리를 보며‘그런가보다’하며 적당히 넘어가면 될 것을, 숫제 처음부터 참았으면 되었을 것을. 마치 며느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줄 알고 “내 말 알아듣겠니, 무슨 뜻인지?”하고 말하니, 노년에 들어서면 불거지는, 했던 말 또하기 버릇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가르치려 들고 은근히 혹은 드러내 놓고 시키는 대로 따라오라고 강권한다.자신의 말이 효과가 없으면 교만함과 자신만만함이 며느리의 가슴에 파고드는 독설로 내뱉게 된다. “너희 친정어머니는 너를 그렇게밖에 안 가르치더냐?”하며 며느리의 마음에 응어리질 만한 표현을 하고 만다. 이때부터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첩첩이 담을 쌓는다.
그 다음부터는 며느리 쪽에서 무언의 반격이 온다. 시어머니가 준 상처 못지 않은 독하고 농도 진한 반격이다. 그 반격이란 뭘까. 며느리는 시어머니뿐 아니라‘시’자 붙은 모든 관계는 피하려 드는 것이다. 기억력이 쇠퇴하는 연령인 시어머니들은 자기가 한 행동이나 말을 잊어버리거나 묻어 둔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시도하지 않은 채‘그래도 내 자식인데….’라는 생각으로 자식들에게 다가가지만 상한 감정이 풀리지 않은 며느리 입장에서는 즐겁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시어머니가 김치며 밑반찬이며 부지런히 날라다 주지만 며느리는 여전히 뾰로통하여 시어머니가 주는 용돈이나 근사한 저녁 식사 대접도 반기지 않는다.
생각만 바꾸면 막힌 담도 허물 수 있다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는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나는, 세간에 유행하는 말들이 있다. “반찬을 해다 주려면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 놓고 돌아오라.”“돈을 주려거든 말 없이 온라인으로 송금하라.”라는 식으로, 얼굴 마주칠 일을 만들지 마라는 것이다. 귀하디 귀한 아들의 여자인 며느리, 사랑스런 손주의 어미인 며느리인데 언제까지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지, 입을 꾹 다물어 말도 없는 철통같이 세워진 며느리와의 벽을 허는 일은 시어머니에게 막막할 뿐이다.시댁 식구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며느리와 화해하기 위해서 조급하게 어찌 해 보려 해도 되는 일이 없다. 급한 맘에 돈도 줘 보고 헛소리로 여길 것이 뻔한 줄 알면서도 뒤늦게나마 듣기 좋은 말을 해 보지만 맥만 빠질 뿐이다. 인간이란 원래 과하게 받는 친절은 불친절보다 불편해하는 법이다. 오히려 마음속 응어리만 더 크고 단단해질 뿐이다. 이럴 땐 조급해하지 말고 서서히 세월을 좀 보내는 것이 낫다. 여기서 어느 시인의 말처럼 허송세월만 흘리고 말 것이 아니다.
시어머니로서 자신만만하고 교만했던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식을 거느리는 것은 인간 성숙으로 가는 길이라 하지 않았던가. 교만한 마음을 벗고 방향을 돌리고 나면, 며느리가 하는 요상한(?) 살림법도꽤 쓸모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손자, 손녀가 수십 년간 익혀 온 할머니의 음식 솜씨보다 엄마가 해 주는 서양음식들을 더 좋아하는 데야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며느리가 하는 음식도 색다른 맛이 있어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고 나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막힌 담을 어찌 해 볼수 있을 것이다.며느리는 시어머니보다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다. 내가 일생에 걸쳐 갈고 닦은 것을 며느리는 마우스 몇 번 누르고 나서 줄줄이 꿰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어머니가 알고 행동하는 것보다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계량을 하니까 뭔가를 해도 실수가 없다. 이런 마당에‘칭찬’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사소한 것일지라도 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면, 더 큰 것을 얻게 마련이다. 며느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응어리가 풀어질 기미가 보이니, 얼마나 큰 이득인가.
며느리도 손님처럼 대해 주라
며느리의 개성이나 능력을 인정해 주고 붙임성 있게 칭찬하는 말을 건네는 것은 거만하게 돈 몇 푼 던져 주는 것보다 몇 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쯤 되면 며느리도‘네’,‘ 아니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던 모습을 감추고 좀 더 트인 마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생각해 보면‘시’자가 붙은 시부모에게 애정이 없는 건 당연하다. 있는 거라고는‘의무’와‘책임’뿐인 것이 며느리의 비애이다. 게다가 말로는 아니라 하면서 은근히 감시하고 비평하는 눈길이 며느리로서는 무척 힘들 것이다. 그저 시집에서는 안 받고 안 보고 안 어울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며느리의 생각이다.사위가 백년손이면, 며느리도 백년손이다. 그래야 남녀가 평등한 셈이다. 우리는 내 집 찾아 준 손님이 여러 모로 나와 다르다고, 개성이 독특하다고 내 식으로 고치라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나와 천양지차 달라도 그건 모두 손님의 개성이려니 하고 봐 넘긴다. 그저 좋은 말, 좋은 음식으로 대접만 해 주면 된다.
이렇게 며느리도 손님처럼 대해 주고 보는 거다. 그리고 며느리의 개성이며 며느리의 좋은 점을 찾아내서 진솔한 말들을 해 준다면, 어느 며느리인들 담 저쪽에서 입만 악물고 있겠나. 저들도 손님으로서 좋은 말로 화답해 올 것이다. 무릇 모든 대화에서, 특히 고부간의 대화에서는 쓴 소리 할 일도 단맛으로 포장하고 누그러뜨려서 해야 한다. 그것은 딸이 아니라, 며느리이기 때문이다.예컨대, “안 된다.”→“애써 보자.”, “그럴 리가 있나.”→“착오는 아닐 텐데.”, “문제구나.”→“이리 이리 하는 게 더 낫겠다.”, “절대로 하지 마라.”→“그리 안 할수록 이로울 거다.”이런 식의 표현은 외교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교양인이며 자기를 성찰해 본 사람의 말투이다. 이런 식의 대화를 하는 사이에 갈등이란 있을 수 없다.끝으로 며느리에게도 한 마디를 하자면, 며느리 역시 초대한 주인에게 왜 그리 구식으로 사느냐고 하면서 주인을 싫어한다면, 초대한 주인이 뭐가 될까. ‘나이 드신 분들은 저런 방식으로 살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젊은 사람으로서 검약하는 모습을 본받고 존경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초대해 주신 어른이 어려움을 당하면, 도와드리고 위로해 드리는 게 손님, 즉 며느리의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