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관이 건강하면 관계가 회복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들뿐 아니라 역사를 두고 인간이면 누구나가 다 직면하게 되는 질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은 자신의 행복은 물론 인간관계의 질과 삶의 현장을 풍요롭게 꼴 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건강하고 균형진 자아관은 스스로 유아독존하여 설산수도를 함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질적으로 자아관을 찾는 일은 영적인 추구이며 관계의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슈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자아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이 영적인 여정임을 잠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삼십대의 결혼한 여인이 하루는 저희‘가정 건설 사역원(Family Building Ministry)’의 문을 두드렸다. 그 여인은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났고 귀여운 자녀를 둘 두었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전에 즐겁게 했던 일들이 하기 싫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제는 즐거운 일도 없고 느낌은 덤덤해지고 무뎌졌으며 삶의 의욕은 물론 식욕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증상으로 보면 분명한 우울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한참 동안 사연을 털어 놓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이“왜 사는지 모르겠다.”아니면“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무척 허망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방금 독백처럼 고백하며 전해준 자아관에 관한 혼돈과 혼란의 상태는 정신적인 이슈를 넘어서서 영적인 성질의 것임을 필자는 감지하였다. 그녀가“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했을 때 필자는 그녀의 영혼 깊은 저변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절규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영적 내면 상태는 마치 창조 전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차고 흑암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던 지구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영적 질문인 것은 그것이 내 삶의 의미와 인생의 방향과 직결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건강한 자아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양 국면이 있음을 보게 된다. 첫째는 내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요, 둘째는 그 인생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목적 의식을 찾는 일이다. 그러면 먼저 건강한 자아관을 형성하는 데 노른자위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의미를 찾는 경험이 도대체 실제로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잠시 헤아려 보자!
사랑이 삶을 의미있게 한다
‘의미’란 곧 나라고 하는 인생을 가치있고 뜻있게 꼴지어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다. 내 삶을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줄 수 있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테마속에도 그 주된 맥락은 주인공들이 나누는 사랑과 실연 또는 못 누릴 사랑에 대한 애절한 사연들로 센티멘탈하고 에로틱하게, 끊어질 듯하나 또 극적으로 연결되는 스릴 넘치는 스토리와 장면들로 청중을 매료해 나간다. 이것은 단적으로 무엇을 말해 주는가? 결국 인간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관계 속에서 산다는 말이며, 바로 이 사랑의 시여(To love)와 수여(To be loved)가 삶을 의미 있게 한다는 단순하고도 심오한 진리인 것이다. 건강한 자아관을 형성하지 못해서 역기능적이고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자신은 물론 함께 사는 사람들까지도 힘겨운 고통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을 원만하게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물론 사랑을 줄 줄 알면서도 안 주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에 주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많은 경우 성장기 시절에 부모든지 아니면 나를 돌보아 주는 중요한 다른 사람들(Primaryrelationship)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사랑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누는 데에도 무지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아관이 건강해야 관계도 건강해 진다
아기가 엄마의 탯줄에 연결되어 자양분을 공급받듯이 사람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특히 가장 가까운 부모와의 관계에서 따뜻한 돌봄과 명확한 한계선을 그어 줌으로 삶을 규모있게 살도록 훈련시켜 주는 적절한 코칭을 통해서, 보고 듣고 숨쉬고 느끼는 삶의 분위기 속에서 균형진 사랑을 충분히 공급받도록 만들어졌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하나가 되는 이런 과정을 심리학에서는‘우리 됨의 정체감(We identity)’을 키우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부모나 나를 돌보아 주는 분들과 인생의 시발점에서 나누는‘우리 됨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어떠하느냐에 따라 평생을 가지고 다니게 될 나 자신의 정체감(Self identity)이 크게 영향을 입는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미국 심리학저널에서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 각자 각자가 갖고 있는 자중심(Self worth)과 자신의 정체감은 그 사람의 외적 성취감으로 결정되기보다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부모 또는 케어테이커들)과 나누는 내적관계의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요즈음 코넬 대학교와 브라운 대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구 발표들에 보면, 어린 시절 아이가 부모와 어떤 친밀감과 연결감(attachment)을 갖느냐에 따라 심지어 학교 성적이나 정신 건강 또는 육체 건강에까지 영향을 입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한 의과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결과 부모와 나쁜 관계에 있는 학생들이 부모와 좋은 관계에 있는 학생들에 비해 위궤양이나 심장 질환에 걸릴 확률이 75퍼센트나 더 높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뿐인가? 딸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빠에게서 인정(male validation)과 애정을 받고 자란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딸보다 십대에 성적인 문란을 방지할 확률이 75퍼센트가 더 높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아들들이 십대를 지날 때까지 아빠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그 아이의 건강한 남성관이 꼴지어진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므로 한 아이가 태어나서 유아기와 십대 또한 청년기를 거쳐 건강한 정체감을 가진 성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는 각 발달과정마다 경험해야 할 관계의 과제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건강한 자아관의 형성은 성장하면서 가
장 먼저 엮어가게 되는 부모와 가족과의 관계들을 통해서 그 대부분이 이미 꼴지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그 이후로 사회 생활을 통해서 갖게 되는 친구들이나 이성들과의 관계 또 결혼해서 배우자와 나누게 되는 관계의 질들이 이미 성장기에 형성된 자아관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많이 좌우되는 것임을 옅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자아관을 키워 주려면
그렇다면 건강한 자아관을 형성하기 위해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어떤 관계의 체험들이 필요한지를 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 제일 먼저 태아 때에는 부부가 화목하고 즐거운 관계를 나눔으로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
브라운 대학교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아이의 감성뇌 속에 자리를 차지한 림빅 시스템(Lymbic system)이라는 정서의 내장 하드드라이브에 엄마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기록되며 5~6개월부터는 아이가 외부의 소리를 민감하게 듣고 느낄 수 있는 청각이나 감각들이 계발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그래서 만약 아이가 태 속에 있을 때 부모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면 이 모든 소리를 듣고 기억하며 마음에 분노와 불안감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아이가 태어난 이후 네 시간에서 여섯 시간까지 아이가 볼수 있는 시력이 15인치라고 한다. 이것은 꼭 젖을 문 아이가 젖을 먹이는 엄마의 눈망울과 마주칠 수 있는 거리다.
바로 이 사실은 아이가 태어나 엄마와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엄마가 아이와 함께 있어 주고 눈과 눈을 마주치며 나누어 주는 포근하고 따뜻한 연결감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영아기 때에 아빠들이 아이를 안아 주고 돌보아 주면 (때론 우악스럽게 안아줌으로 아이를 울리기도 하지만) 아빠의 힘센 손길 속에서는 아이가 정서적으로 든든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유아기에서부터 십대 초반까지는 부모가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즐거워해 주는 생생한 영상과 구체적인 추억들로 가득 채워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본인 자신이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 영화의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가는 즐거운 시간들로 줄이어진다면 가슴은 푸근해지고 금방 코끝이 찡해지기까지 할 것이다.
필자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 때마다 미국에서 자라난 2세들에게 늘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성장기에 가족들과 나눈 추억들 중에 가장 생각나는 것들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안타깝게도 많은 청소년이 당황스러워 하면서 매 맞은 것, 벌 선 것, 혼자 텔레비전을 보는 것, 함께 식당에 가는 것 외에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가끔 어떤 청년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흥분된 모습으로 아빠가 만들어 준 플레이 하우스(play house) 또는 함께 바닷가에 갔던 경험들, 소꿉놀이를 함께 했다거나 탁구를 치거나 칼싸움을 했다는 등등의 경험들을 기억하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이들에게 건강한 자아관을 키워 주는 데 부모가 함께 놀아 주는 것처럼 좋은 자양분도 없다. 왜 그럴까? 함께 놀아 주는 경험들을 가장 귀한 추억들로 기억하는 이유는 이런 체험들이 아이들에게“너는 내게 아주 소중한 아이야! 너는 내가 함께 놀아 줄 만큼 아주 예쁘고 귀여움을 독차지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야! 나는 너와 함께 있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고 즐기고 있거든!”이라는 메시지로 온몸이 전율하도록 전달해 주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렇게 부모와의 따뜻한 추억과 체험들로 자녀의 기억을 채워 줄수 있다면 우리의 후세들은 불필요한 방황이나 그릇된 중독에서 보호받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나누는 관계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려는 비인간적이고 역기능적인 노력들을 삼가게 될 것이다.
병든 자아관을 치유하는 것이 관계 회복의 첩경
에릭 에릭슨이란 정신 분석학자의 유명한 발달 과정표에도 언급된 것처럼, 자녀들이 십대의 시기를 거치며 18세가 될 때까지 자신에 대한 정체감의 과제가 마무리지어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작업이 아들은 어머니와 건강하게 분리되면서 아버지와 연결되고, 딸들은 아버지와 건강하게 분리되면서 어머니와 가까워지는 경험을 통하여 이룩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자신에 대한 건강한 정체감 곧 자아관을 꼴짓게 되면 그 이후에 있을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준비가 된다는 것이 에릭슨의 논지이다.그런데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성장기를 생각하면서 교제의 추억들보다는 등한시당한 느낌 또는 배척감,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슬픔, 분노 또는 텅빈 공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아니면 성인이 되었어도 삶의 목적의식에 대한 혼란 내지는 방황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성장기 시절에 받은 이런 정서적 상처나 결핍들을 해결하거나 치유받지 못한 채 결혼했다면 분명 친밀해야 할 결혼 관계는 고통과 상처가 증폭된 현상일 것이 분명하다.
많은 경우 결혼 관계에서 표출되는 문제가 그 구성원 각자가 성장기 시절에 해결하지 못한 이슈들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많은 부부가 그렇게 하듯이 배우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문제의 원인과 원망의 화살을 타인에게만 돌린다. 이렇게 되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상대방만을 바꾸려고 피나는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안 되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끊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관계에 얽힌 부부 문제들을 상담해보면 저마다 성장기 시절부터 짊어지고 온 과거의 문제라는 짐 보따리가 항상 현재 문제의 증상 뒷면에 깊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렇게 성장기 시절에서부터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해결하지 못한 문제 덩어리를 과잉 짐 보따리라고 표현한다.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이 성장기에 받은 상처나 꼭 받아야 할 것들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결핍증들에 대한 치유와 양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오늘의 관계에 얽힌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풀린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것이다. 그 문제의 증상이라는 저변에는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엄청난 덩치의 빙산이 숨어 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 나감으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장기 시절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보따리를 풀어야 한다. 망가지고 부서진 자아를 치유하고 건강한 자아관을 덧입는 길은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게 되는‘우리 됨의 관계’곧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그러므로 잃어버린 자아, 상처난 자아를 치유하는 길은 필경 영적인 여정이다. 더더욱 끊어진 관계나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도 영적인 여정인 것이다. 결국 임마누엘 칸트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의 고향인 하나님을 찾고 만날 때 진정으로 나 자신을 찾을 것이며 바로 그 길이 관계 회복의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