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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가?

은빛지붕 2025. 2. 2. 00:01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은 십자가 시대 이후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인가?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으니까요. 우리가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죄는 용서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법, 특히 십계명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위 글을 보낸 독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기본적인 쟁점은‘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옳고 그름에 대한 안내자로서 기록된 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외형적인 도덕률을 고려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있다.친구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배우자에게 충실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내 친구의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록된 도덕 안내책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성경 본문. 로마서 6장 14절과 7장 6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이제는 우리가…율법에서 벗어났으니.”그러나 로마서를 훑어만 봐도 법은 여전히 우리 생애에서 죄를 지적하는 적절한 기능이 있다는 진술들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20절, 7장 7절을 보라). 로마서 6장 14절과 7장 6절을 반율법주의가 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때의 문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율법은 아무 기능도 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율법이 기능을 하고 있다고 바울이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구원과 법.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시대에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율법이고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식은 은혜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장 28절). 이 말은 세계 역사에서 어느 시대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로마서에서 바울이 진행하는 핵심 논쟁 중 하나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갈라디아서 3장 17절).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는 기초가 된적이 없었다. 모든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만 구원받는다.신약성경의 사랑. 반율법주의자들이 외적 도덕법 사상에 반대하는 데 사용하는 또 다른 논쟁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사랑으로 인해 그분을 순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서도 진실이다. 전체 율법은 마음과 뜻과 혼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두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마태복음 22장 37~40절을 보라). 그리고 예수는 구약에서 그 말을 인용해 사용하였다(신명기 6장 5절, 레위기 19장 18절).


사실 구약의 첫 율법서 중 하나인 신명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훈계로 가득 차 있다(신명기 7장 9절, 10장 12절, 11장 1, 13, 22절, 13장 3절, 19장 9절, 30장 6, 16, 20절). 사랑에서 우러난 순종이 신약에 나오는 것만큼이나 구약에도 나온다.
 마음의 순종.‘법’이 없다는 견해의 또 다른 논쟁은 새 언약하에서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외적 법률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서도 마음에서 우러난 순종을 찾으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명기 6장 6절). 마음이라는 단어는 신명기에 스물여섯 번 등장하며,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이 하나님 및 그분의 법을 잘 준수하기 바라는 상황에서 언급되었다.마음 논증과 사랑 논증 모두 변화된 마음이 옳고 그름의 차이를 결정하는 데 적당하며 회심한 사람은 외적으로 기록된 도덕 지침이 필요치 않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장 9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회심한 마음도 부패되어 있다. 회심한 마음은 마음의 속임을 기꺼이 알아내려고 하지만 회심이 모든 속임수에서 우리를 치료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죄와 품성의 결점을 지적하기 위해 외적 지침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온전히 계시된 뜻으로서의 법. 유대인은 때로 법을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였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때 신약성경은 우리를 위한 법이 된다. 신약성경에는 기록된 도덕적 지침들이 가득 차 있다. 여기 몇 가지 예가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로마서 13장 1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린도후서 6장 14절).
“서로 비방하지 말라”(야고보서 4장 11절).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한일서 2장 15절).


신약에는 이러한 외적 지침, 다시 말해 법 규정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마음으로 사랑의 생애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죄악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사랑이 가득한 변화된 마음이 적절한 도덕적 지침이 되며 어떤 외적 지침도 필요 없다는 개념을 우리는 옹호할 수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법 논쟁을 읽어갈 때 해결해야만 하는 사안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외적 도덕률이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논쟁점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외적 지침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는다는 데 있다는 점이다(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무엇이 비도덕적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마음에 물어보아서는 안 된다. 외형적 형태를 지닌, 성경에 기록된 법률에 물어보아야 한다.성경 전체가 외적 도덕지침, 즉 법이다. 그 법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 이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도덕적 가르침을 제거하고 옳고 그름을 우리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에 의존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 사이에 혼란이 크게 일어날 것이다. 한 사람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그 마음이 말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는 “아니다, 내 마음에는 그것이 옳다.”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 줄 기록된 권위가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날 법의 적절한 기능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한 이유이다.


법과 구원. 그리스도인은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우리의 순종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생각-를 피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법은 죄를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법을 폐지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예수가 죽을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우리 구원을 위해 함께 수고하는 쌍둥이이다. 법은 우리 죄를 지적한다. 그것이 법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죄를 자각하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이기기 위해 예수께로 간다.그대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성경절이 기억난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그대는 그 일을 하지 않았는가? 혹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저질렀고, 그런 다음 이미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고 있기에 죄책감을 느꼈는가? 두 경우 모두 율법은 그대 생애에서 적절한 기능을 행하였다. 그대가 예수님과 진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들 각각을 우리가 해결해야 할 품성의 결점이 삶에 있다는 경고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법이 우리 삶에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였다는 점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