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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덤의 곰팡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은빛지붕 2025. 2. 25. 00:01


에스페로 9208, 내 차가 폐차되기 위해 견인되는 순간의 쓸쓸함
은 아직도 생생하다. 잊혀졌던 존재가 가슴 시리게 영혼을 깨운 탓이다. 오래 전 아버지는 평생 가져보지 못한 자가용을 아들에게 선물해 주셨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열심히 타라고 하시곤 가끔 태워 달라시며 웃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몇 번 태워 드리지 못했다. 아직도 새 차 냄새가 기분 좋게 하던 어느 날 아버지는 평생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그 길로 삶을 정리하셨다. 장례식에서 가장의 대를 이으려고 눈물을 삼켰지만 차를 탈 때마다 아버지 냄새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이름으로 하루라도 더 사용하려고 상속절차를 미루다 많은 벌금을 내면서도 난 그분의 기억으로 기뻤다. 하나님을 위해 밤낮을 달리고 이웃을 위해 생수에 빨랫감까지 실어 날랐다. 언제나 나와 내 가정의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나면서 차는 이곳저곳 도색되고 고쳐지며 그렇게 늙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간절함을 나는 잊어 갔다. 아버지의 것보다 더 진하고 매력적인 냄새와 자극으로 만족하며, 언제부턴가 차에 비가 새기 시작했다. 창피하고 어이없으면서도 한편 재미있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 운전을 하면 옆자리의 아내는 연신 빗물을 닦아내며 아이들과 즐거워했다. 함께 생활하는 학생들은 처음에는 창피해 하고 9208 타기를 기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내 차의 가난함을 매력으로 평가해 주었다. 이 차 절대 바꾸지 말라면서, 새 차들 사이에 버짐 핀 채로 서 있는 에스페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댔다. 사람들에 의해 평가된 청빈 가치와 인기에 난 아버지가 아니라 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명절을 맞아 홀로 되신 어머니를 뵈러 먼 길을 여행했다. 하루 더 자고 가기를 바라시는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 어머니를 떠나 서울로 오던 길에서 폭풍을 만났다. 그날은 비가 유난히 거침없이 차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날의 빗물은 유쾌하지 못했다. 어미를 섭섭히 떠나는 아들의 울적함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물 때문이었음을 난 몰랐다. 그렇게 그날 아버지는 무정한 아들의 가슴에 눈물을 쏟으셨다. 그 눈물들이 채 마르기 전에 차 안은 곰팡이로 가득 찼다. 2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날, 차 문을 연 나는 아연 실색했다. 시트, 보드, 바닥, 운전대까지 가득 덮은 곰팡이들을 보며 잊고 있었던 냄새를 기억해 냈다. 아버지 무덤에서 맡았던 곰팡이 냄새, 그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해낸 것이다.


폐차되는 차가 견인 사슬에 망가지는 것이 싫어 작업에 간섭하는 나를 이상히 보며 견인차 아저씨는 손에 15만 원을 쥐어 주었다. 잊혀진 내 아버지 값이란다. 그러고 나서 곰팡이 냄새를 내 기억 속에 남기고 떠나갔다.난 그 돈으로 아버지에게 갔다. 응달진 곳에 핀 곰팡이들을 뽑아내며 해지기를 기다렸다. 같이 갔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만큼 어둑해지자 아버지 옆에 누웠다. 아버지가 내 영혼의 곰팡이 냄새를 맡으시도록 가까이 누워 오랜만에 안아 보았다. 마음껏 아버지 냄새를 맡았다. 눈물을 아버지 가슴에 쏟았다. “아버지, 아들입니다.”
추석엔 아무 느낌도 냄새도 없는 아반떼로 어머니에게 간다. 우리 가족이 이 차로 행복하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