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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도하는 존재

은빛지붕 2025. 4. 16. 00:02


 

 

하루는 플라톤의 제자들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플라톤에게 나아와서 자신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플라톤은 “하늘에 계신 제우스여!…”로 시작하는 기도문을 알려 준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물었던 것과 동일한 물음이자 동일한 답이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제자들은 왜 그들의 스승에게 기도를 배우고자 했을까? 저들은 아마도 스승의 위대한 능력과 권위가 독특한 기도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스승의 기도로부터 동일한 능력을 부여받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기도하는 존재
사람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이 존재론적 명제를 설명한 사람은 닐스 페레라는 종교학자였다. 그는 데카르트의 아포리즘을 이용해“나는 기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을‘사유하는 존재'로 규정한 데카르트의 통찰력이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합리적인 존재의 등장을 알리는 중요한 철학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면, 인간을‘기도하는 존재’로 설명하고자 한 닐스 페레의 말은 이성이 도구화된 현대사회에서 연약한 인간이 지니는 종교적 본성,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하는 종교적 실존에 처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론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다 기도를 삶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로 경험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위에 언급한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렇고, 자녀나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께 기원했던 우리의 어머니나 아내들도 그렇다. 도의 깨달음을 위한 면벽기도나 자녀의 대학 합격을 위한 백일기도, 욕망과 번뇌를 씻어내기 위한 백팔기도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유기도 등 우리의 삶 주변에서 진정을 담아 절대자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기도하는 존재임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타일러와 프레이저가 종교학적으로 간파했듯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종교적 존재임을 설명해 주는 기본적인 경험현상이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는가? 기도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기도는 모두 다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기도가 인간의 내면적인 종교성의 표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일반적으로 기도의 종류에는 탄원기도, 감사기도, 중보기도, 참회기도, 명상기도 등이 있다. 기도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드리는 기도는 대개 이런 종류의 기도들이다. 탄원기도란“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같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말한다. 이와 같이 감사기도란 절대자로부터의 도움에 대한 감사를 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를 말하며, 중보기도란 연약한 인간 동료를 위한 간구를 말하며, 참회기도란 지은 죄로부터의 용서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들은 형식에서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즉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를 향한 간절한 아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예수의 주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것은 바로 이러한 기도의 내용들이 하나의 기도 형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에 비해 명상기도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것은 우월한 존재를 향하여 그의 도움을 간청하는 형태가 아니라 스스로를 의존하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관조하거나 명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형태를 우리는 관조(觀照), 관상(觀想) 혹은 묵상(默想), 명상(冥想) 등으로 표현한다. 결국 인간이 드리는 기도를 형식적으로 구분한다면 절대자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 혹은 기원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관주하는 묵상 혹은 명상이 있는 것이다.

 

종교적 기도와 관련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말하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 기도는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기도의 정의를‘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기도(혹은 기원)는 인간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간구하는 것이고, 묵상(혹은 명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앤드리어슨과 같은 신학자는 기도하는 만큼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이러한 종교사상가들의 통찰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탄원기도와 신의 음성을 듣는 명상기도라는 기도의 두 형식 모두에 충실함으로써 인간이 비로소 기도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기독교의 기도, 다른 종교의 기도
기도의 이 두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의 기도와 차별화된다. 종교학자 올덴베르그가 말했듯이 불교와 같은 종교에는“싸움을 하는 동안 도와 달라고 빌 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사를 돌려야 할 신도 없다.”따라서 이런 종교들에 있어서 기도는 대부분 명상기도에 국한된다. 물론 그들도 아미타불에게 기원(나무 아미타불)을 드리지만 그 아미타불 역시 인격적 대화의 상대는 아니다. 그리스도교만이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탄원, 감사, 중보, 참회 등의 기원을 드린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도가 지니는 강력한 힘이 된다. 물론 이 탄원기도를 잘못 사용해 오늘날‘야베스의 기도’와 같은 짐짓 왜곡된 기도 내용이 보급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결과이다.

 

그리스도교의 탄원기도에는 자신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무한함에 대한 고백과 구원하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타인의 필요에 대한 중보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대한 소망등이 포함된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요지이다. 이런 고백과 감사와 중보와 소망에 대한 기원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기도의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을 추구할 때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진정으로 타 종교 및 다른 종류의 기도들과 차별화된 궁극적 의미에서의 기도가 된다.독일의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그림과 뒷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준다. 그것이 그렇게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지니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그림은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며, 그 기도란 사랑과 감사와 중보의 마음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라는 사실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뒤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아름다움을 잘 그려내고 있다. 기도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바로 이런 기도를 구현해야 한다.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후서 5:16~18)고 권면하였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기도하게 된다. 이 존재론적 사실을 모두가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욱더 열심히 기도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진정한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기도의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