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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은빛지붕 2015. 8. 2. 17:59

 

미당 서정주님이 타계하신 후 15년이 흘렀다.

시인께선 이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죽음은 정녕 "닫힌 문"인가보다. 누구에 의해서도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며, 죽음의 외형에 불과하다.

늘 만나서 눈빛과 대화를 교환하고 손을 마주잡기도 하며 지내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홀연히

미지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

그리고 그의 육신이 썩어가기 시작하는 것 - 이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죽음의 당사자조차도 자기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체험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일이다.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에 그는 체험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죽음의 체험은 이미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시는 체험이다."라고 릴케가 말하였다. 나는 이 명제에 보편성을 부여하여 "삶은 체험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체험을 위하여, 그리고 체험에 의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인간은 체험의 감응장치인 것이다.

 

남들처럼 나도 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있으면 기쁨과 위안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풍요로운 세상에 내가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삶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그 꽃을 나의 사유물로 독점하고 싶어진다.

이 소유욕이 문제이다.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꽃을 꺾기 시작하면 꽃밭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릴 것이다.

또한 꺾어진 꽃들은 곧 시들게 될 것이다. "화단에 들어가지 마시오. 꽃을 꺾지 마시오." -

참 훌륭한 말이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살아야 한다.

 

서정주님의 시 중에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작품이 있다.

만나러 가는 마음에는 만남의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취하려는 기대와 탐욕이 있지만,

만나고 가는 마음에는 그 대상의 내면화를 위한 자기성찰이 있을 뿐이다.

체험이란 이런 자기성찰에 의하여 외계의 사물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융합하는 과정인 것이다.

꽃을 꺾어 가는 게 아니고 마음에 담아 가는 일인 것이다.

만나러 갈 때보다 만나고 갈 때의 의미가 훨씬 더 강조되고 있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나고 가는 바람"이 되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라야 한다.

들뜬 마음으로 소풍 길에 나서고 있는 초등학교 아이에게 "소풍 마치고 가는 아이"처럼 행동하라고 주문하면 곤란하다.

 

나는 어떤 바람일까? 나이로 보아서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이 되어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과연 나는 "만나고 가는 바람"일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아직도 나는 무언가를 "만나러 가는 바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연꽃 몇 송이를 꺾고 싶은 충동조차 제어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어이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