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쇼크
세계보건기구(WHO)의 ‘2013년 세계 보건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1세(남성 77세, 여성 84세)이며
197개 회원국 가운데 17위를 차지할 만큼 장수 국가로 분류되었습니다. UN은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총 인구의
7퍼센트를 넘어서면 고령화 사회, 14퍼센트를 넘으면 고령 사회, 20퍼센트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로 나누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고령화 통계’에 따르면 현재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613만
명으로 12.2퍼센트에 이르고 2017년이면 고령 사회에, 2026년이면 초고령 사회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고령 사회가 되면 특히 남성의 경우, 직장 생활이나 사업 경영을 통해 경제적으로 크게 겪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급여나 벌이가 끊기고,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만나던 사람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외로움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건강마저 잃게 된다면 훨씬 열악한 노후 생활에 직면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테드 피시먼의 <회색 쇼크>에는
주부들이 은퇴한 남자들을 묘사하는 재미난 표현이 있습니다. 은퇴한 남자는 고장 난 냉장고나 부서진 안락의자처럼
‘덩치 큰 폐기물’이라는 겁니다. 음식을 신선하게 해 주지도 못하고 안락함을 주지도 못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리기에는
너무 크다는 뜻이지요. 남성들에게 노년은 외로운 시기입니다. 은퇴 후에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몰려오고 열심히 땀 흘려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깊은 허탈감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퇴남편증후군
여성들의 경우에도 일본의 신경정신과 의사인 구로카와 노부오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남편의 은퇴로 부인의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하면서 몸이 자주 아프고 신경이 과민해지는 증상을 겪는데 이를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 RHS)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노년기 일본 주부의 60퍼센트가 이런 증상을 호소하는데 은퇴로 인해 남편과 아내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퇴한 부부가 사소한 입장 차이로 인해 다투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은퇴한 남편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아내의 외출은 잦아집니다. 남편은 부인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여행을 하며 노후를 즐기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친구와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하고 아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여보, 어디 가?”, “나가면 언제쯤 와?”라고 묻습니다. 행선지와 귀가 시간을 시시콜콜 묻는 남편이 아내에게는 달가울 리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점심 식사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남편으로서는 아내의 행선지보다 아내가 점심 전에 귀가해
자신의 점심상을 차려 줄 것인가가 더 궁금하고 혼자 끼니 챙기는 것을 무척 어려워합니다. 일을 가졌을 때처럼 아내가
당연히 차려 주겠거니 하겠지만 은퇴 후 사정은 달라집니다. 남편의 은퇴 후에도 여성들은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아침상 차리기, 설거지, 빨래, 청소 등등 한숨을 돌리고 차라도 한 잔 마시려 하면 벌써 11시가 되고 11시 30분쯤에는
또 점심상을 준비해야 하니 이런 일상이 반복되는 걸 좋아할 주부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은퇴 후의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친분을 맺도록 돕고,
쉬운 요리 몇 가지 정도는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은퇴를 통해 생활의 중심이 직장이나 일터에서
가정으로 옮겨 온 만큼 부부간에 배려를 통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노후를 보내야 합니다(출처 : 김동엽, <스마트 에이징> 참조).
무연 사회(無緣社會)
최근 우리나라도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이나 친지와의 교류가 끊기고, 회사에 다닐 때 가졌던 사연(社緣)마저 단절되어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없는 무연 사회(無緣社會)가 돼 가고 있습니다. 동료와도 헤어지고 친구도 떠나고 외롭고 쓸쓸
하고 서글픈 사회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지켜봐 주는 이 없이 홀로 세상을 떠나는 노인들이 점점 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고독사(孤獨死)’가 잦아지면서 새로운 비즈니스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고독사로
사망한 시신은 평균 21일 만에 발견되는데 방에서 악취가 날 만한 기간이다 보니 유족들조차 방에 들어가기를 꺼려
아예 ‘유품 정리 회사’가 생긴 겁니다. 요시다 다이치 사장이 설립한 ‘키퍼스’라는 회사인데 그는 “유품 정리 사업은
외롭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시신을 옮기고, 청소를 하고, 남은 유품을 정리해 유족들에게 전달하거나 버리는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 외롭고 가난하고 질병에 취약한 노인들에게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지지는 희망적인
의지를 일깨워 주고 그들의 삶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
지난 2월,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 <살아가려면 이들처럼>을 쓴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 소재원 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가 실제로 경험하여 그의 책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는 잠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 고개를 숙이고 라이터에 내 입을 가져다 대는
순간 바뀌는 신호를 못 본 상태에서 앞 차와 접촉 사고를 내고 말았다. 80년대에 생산된 낡은 고급 승용차, 각그랜저라
불리는 차량이었다. 난 둔탁한 소리가 나자마자 재빨리 차에서 내려 앞 차량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속도가 그리 높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고라 차의 손상 상태는 양쪽 다 경미했고 나는 운전자가 내리는 모습에 너무나 죄스러워지고 있었다.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머리는 새하얀 분이 천천히 내리고 계셨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그것보다 젊은 양반이
주의를 좀 했어야지. 이봐! 자네 이리 내려 봐!” 내게 조금의 원망의 눈살을 보내신 할아버지는 재빨리 조수석으로
다가가 함께 동석했던 할머니를 내리게 하셨다. “어때? 다친 데 없어?” 할머니는 멍하니 그저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이! 이리 걸어봐!” 나는 안중에도 없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10미터정도 도로를 걸으셨다.
“괜찮은 거 같네.” 난 그런 할아버지께 다가가 다시 사죄를 하고 연락처를 전해 드렸다. “됐어. 젊은 사람이 더 놀랐겠지.
우리 같은 늙은 사람들은 살짝만 부딪혀도 부러지거나 크게 다치는데 오늘 이렇게 사고가 나고도 안 다친 걸 보니 오늘
운이 좋은 날인 거 같아.” “그래도 아프실 수 있으니 연락처는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오늘은 저와 함께 병원에
가세요.” “어차피 병원 가는 길이었으니 걱정 마. 안사람이 치매라서….” 할아버지는 날 보다가 갑작스레 할머니의 손을
더 꼭 쥐시며 할머니를 바라본다. “이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든지 놀랐으면 놀랐다고 말을 좀 해 봐!” 힘없이
할머니께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말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저, 일단 함께 병원 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나는 굳이 괜찮다는 두 분을 모시고 그분들이 자주 다니시는 병원을 찾았다. 솔직히 작가라는 직업이 호기심을 자극해서
였을까? 사고의 죄의식과 긴장감보다는 두 분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리저리 검진을 받으시는
동안 마치 한몸이라도 되는 듯 항상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곁을 따라가셨고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듯 함께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할머니! 요즘 어떠세요?” 웃으며 이야기하는 의사와는 달리 할머니는 그저 멍하니 앉아 계셨다. 진료가 끝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나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힘드시겠어요. 죄송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렇듯 제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요.” “힘들긴! 허허! 내가 왜 이 사람을 포기 못하는 줄
알아?”“네?” 할아버지는 이내 말씀을 이으셨다. “처음에 안사람이 치매라고 했을 땐 요양원에 보낼까 생각도 했었어.
5년 전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바쁘게 살았거든. 진행하던 사업도 꽤 많았고 말이야. 그런데 요양원에 보내려니 이 사람이
말하는 말이 이 사람을 포기 못하게 만드는 게야.”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한참 회상에 잠기시는 듯한 얼굴로 멍하니
수납 대기 카운터의 전광판을 응시하시더니 다시 말문을 여셨다. “내가 바쁠 때나 힘들 때나 언제나 이 사람은 내게
‘사랑해.’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해 줬었거든. 그런데 이 사람이 치매로 이렇듯 살면서도 그 기억은
남아 있나 봐. ‘사랑해!’ 아직도 이 말만큼은 내게 꼭 해 주거든. ‘이런 사람 떠나보내고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사랑해! 사랑해요.”
우아한 노후
우아하다는 말의 정의는 ‘기품이 있고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여성은 온후한 모습으로,
남성은 중후한 노신사의 모습으로 서로 사랑하며 늙어 가는 것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노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산다면 그저 사는 대로 살게 될 뿐이지만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삶의 목표를 설정한다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난 2월,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졸업 축하 공연 무대에서 한 유명 국악인이 부른
노랫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바람이 불면 돛을 달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라!” 그렇습니다.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지만 돛의 방향을 조정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힘 닿는 대로 노를 저을 수 있습니다.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일은 우아한 노후를 보내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우아하게 늙기 위한 노인 자신의 노력과 의지도 중요
하지만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돌봄과 지지는 더욱 중요합니다. 외로운 노인을 외롭지 않게 돌보아야 할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고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의 삶을 가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깊게 팬 주름진 이마를 펴게 하고
질곡으로 굵어진 손마디를 어루만지고 그들의 마음에 보람과 기쁨을, 그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노인들은 구름 사이로 자리를 비켜 서서히
물러가는 아름다운 석양입니다. 우아한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이 행복한 노년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 사회를 마음에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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