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린(Turin)의 성의(聖衣)가 기독교계 내외에 큰 화젯거리가 됐던 때가 있었다. 그 옷은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壽衣)라고 하는데, 거기에 찍혀 있는 근엄한 형상이 바로 예수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조사 결과 최근의 것으로 판명 나긴 했지만, 이런 소동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얼굴을 얼마나 보기 원하는지 드러내 주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최대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예수의 얼굴을 뵙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 고난당하신 구주 예수의 얼굴을 뵙기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의 가정치고
예수의 얼굴 그림을 걸어놓지 않은 가정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의 어머님은 예수의 얼굴 그림만 보시면 정성스럽게
오려서 벽에 붙여 놓고 보신다. 그러나 그 그림이 정말 예수의 얼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걸어 두지는 않으신다.
화가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린 것이라는 것쯤은 아시기 때문이다.
얼굴을 그리는 데 품성을 알아야 했던 사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신약성경의 사복음서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분의 얼굴을 묘사한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함께 3년 이상 생활했던 그분의 제자들은 후일 그분의 얼굴을 몹시 보기 원할 미래의 신자들을 위해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 그분의 얼굴 모습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인상착의 정보조차도 주지 않았다. 화가를 동원해서
초상화도 그려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을 동원해서 그분의 석상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인상착의도 모르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을 때 얼마나 큰 어려움에 봉착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얼굴을 그리려다가 평범한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끝나버리기가
일쑤였을 것이다. 사실상, 예수의 얼굴을 그리는 일에 있어서 큰 전환점은 종교 개혁 이후 화가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화가들은 사복음서를 연구하면서 그곳에서 한 위대한 인격을 발견하였다. 동정, 사랑, 긍휼 그리고 희생이 충만하신 한 분의 모습을 그들은 보게 되었다. 이기심이라곤 한 터럭도 없는 분을 그들은 만났다.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이러한 정신적 특징들을 예수의 얼굴 표정과 모습에 그려 넣으려고 애썼다. 게다가 그분은 사람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시기도 했다. 사람의 얼굴 속에 그려 넣어야 할 하나님의 모습! 참으로 지난(至難)한 과제였지만, 그런 진지한 노력의 결과로 많은 기독교인의 갈망을 조금이나마 만족시켜줄 수 있는 명작들이 탄생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리려면 그분의 품성을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분의 인격을 화폭에 어느 정도 담기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이 그 작품에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품은 감정은 용모에 그 흔적을 드러낸다.” “인간의 용모 그 자체는 영혼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관찰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품은 감정, 그분의 인격 또한 그분의 용모에 흔적을 드러냈을 것이다. 복음서를 통해 나타난 그분의 인격을 토대로 판단해 볼 때, 정녕 그분의 얼굴은 사랑이 충만한 얼굴, 인자한 얼굴, 친절한 얼굴 그리고 인정미
넘치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하신 예수의 얼굴에는 겸손미와 부드러움이 역력했을 것이다. 항상 생각이 깊으셨던 그분의 얼굴은 사려 깊은 얼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예수의 얼굴 생김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언행을 통해서 나타나는 품성 묘사에는 적극적이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타고난 얼굴 모습이 아니라 그 얼굴에 표현된 내적 품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보다 그 얼굴에 나타나는 인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형수술 없이 얼굴을 아름답게 만드는 법
어떤 사람을 극도로 증오해 온 사람이 있다. 그는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면서 그 사람을 죽일 기회를 엿본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의 얼굴이 마귀의 얼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움이 그의 얼굴 모습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 얽힌 일화도 마음가짐이 얼굴에
미치는 영향을 증거 해 준다. 즉, 너무 순수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워 예수 모델이 되었던 사람이 나중에는 사악한 가룟
유다 모델까지 겸했다고 한다. 부정적인 정서가 그의 모습을 마귀의 얼굴을 닮도록 바꾸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좋은 품성은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한 기독교 저술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은 용모를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면 성령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되며, 그것은 용모를 변화시킬 것이다.”“사랑은 용모를 빛나게 한다.”우리는 사랑과 동정을 베푸는 손길과,
사려 깊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런 증거들을 본다.
부부의 얼굴이 닮아가는 이유
여러 해 전 중앙일보“분수대”에 부부의 얼굴이 비슷해지는 이유를 논한 매우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그 가설(假說)은 이러했다. 우리 몸의 근육 가운데 가장 섬세한 얼굴 근육은 우리가 마음에 품은 정서를 얼굴에 정확하게
그려낼 수가 있다. 얼굴의 여러 근육이 조합(組合)되어 연출해 낼 수 있는 표정은 7,000가지가 넘는다. 웃을 때 사용하는
근육과 짜증 날 때 사용하는 근육의 조합이 다르다. 자, 여기 각기 다른 배경과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있다. 결혼하여
부부가 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인생길의 동반자로서 웃을 때 함께 웃고, 울 때 함께 운다. 말하자면 같은 정서를 같은 시간에 경험하기 때문에 같은 얼굴 근육을 거의 같은 시간 동안에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면
그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가설이긴 하지만 매우 일리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이치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분과 동행하면서, 그분이 웃으셨을 장면에서 나도
웃고, 그분이 우셨을 장면에서 나도 우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과 성품을 품고 살면 분명 그분의 얼굴 표정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예수를 닮으면, 얼굴 또한 그분을 닮아갈 것이다. 우리가 품은 감정은 용모에 그 흔적을 드러낸다.
마음을 바르게 갖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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