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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선생님

by 은빛지붕 2023. 10. 19.

 

 

“할머니 선생님은 왜 그렇게 늙었어요?”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민규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응, 나이를 먹어서 그래. 나도 옛날에는 너희처럼 꼬맹이였단다.”

 ​그동안 젊은 선생님만 보아 온 아이들에게 할머니 선생님은 당연히 낯설고 신기했을 것이다.

그녀는 유아교육학과 늦깎이 학생이었고, 오늘은 실습을 나온 첫날이었다.

누군가 왜 뒤늦게 대학에 들어왔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대답하고는 했다.
“자식들은 얼렁뚱땅 키웠지만 손자만은 신식 할머니답게 제대로 가르치면서 돌보려고요.”
 실제로 내년이면 직장 다니는 며느리 대신 그녀가 손자를 돌봐야 한다.

그녀는 손자가 오기 전에 뭐든 한 가지라도 제대로 배워서 멋진 할머니 역할을 해내고 싶었다.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어 줄게요.” 그녀는 말을 안 듣는 꼬마들을 간신히 자리에 앉히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새어머니와 두 언니는 날이 갈수록 신데렐라를 못 살게 구박했어요.”  그녀는 꼬마들이 재미있게 듣게 하려고

고개를 앞뒤, 좌우로 흔들고, 손을 까딱이고 다양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하영이가 울상을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머니 선생님은 왜 고개랑 팔을

막 흔들어요? 목소리도 왜 이상하게 해요?” 내 딴에는 재미있게 그리고 호기심을 느끼게 하려고 온 몸을 움직이고

애들 목소리를 흉내 냈는데 그게 어색했나 보다. “그래야 재미있잖아. 재미없었어? 가만히 읽으면 재미없잖아.”

그녀의 말에 하영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고개 많이 흔들면 아프잖아요.” 하영이는 그녀의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놓아 주고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가 무리하면서 책을 읽어 주는 것이 걱정스러웠던가 보다. 정말이지

기가 팍 죽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네다섯 살 꼬마들 앞에서 티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녀는 다시 용기를 내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신명나게 읽을 수는 없었다. 아까보다는 손도 조금만 움직이고 고개도 살짝만 흔들고

목소리도 부드럽게 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남이가 그녀에게 초콜릿 한 개를 불쑥 내밀었다.

“할머니 선생님, 초콜릿요.” 제 딴에는 그녀가 기운이 없어서 책을 힘없이 읽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살아오는 동안 가장 힘든 대화 상대를 만난 듯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간신히 동화책 읽기를 끝내고

이번에는 율동 시간이었다. 그녀는 음악을 틀어 놓고 아이들에게 율동을 시켰다. “자, 우리 모두 재미있게 춤을 추어요!”


그녀는 음악에 맞춰 율동을 시작했다. 앉았다 일어났다, 옆으로 돌았다가 손뼉을 치고 엉덩이를 씰룩씰룩.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꼬마 녀석들에게 맞추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방 숨이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기운을 내어 율동을 하려는데 소연이가 다가와 그녀 손을 잡았다.
“할머니 선생님, 힘드니까 쉬세요. 제가 할머니 대신 춤출게요.” 다른 애들은 의자를 가져와 그녀를 앉게 했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엉덩이를 씰룩씰룩 손뼉을 치며 신나게 율동을 했다. 우습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하고,

그녀는 앉은 채로 손뼉을 치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낮잠 자는 시간까지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뛰고 노는 것이 힘들었는지 아이들은 금방 잠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원장 선생님이 그녀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힘드셨지요? 오늘 애들한테 아주 좋은 공부를 가르치셨어요.”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원장 선생님이 다시 웃었다. “가르치지 않았어도 애들은 할머니 선생님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벌써 다 배운 걸요.”

그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제가 아이들 선생님이 아니라 애들이 제 선생님이었어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생님을 만난 아이처럼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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