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모음

졸혼의 계절

by 은빛지붕 2023. 12. 19.

얼마 전 일본 친구 핫토리에게서 카톡이 왔다. 40년 결혼의 종지부를 찍고 졸혼을 선언했다고 한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혼자서 집 부근의 오사카성을 산책하기도 하고 츠루하시의 민단거리의 반찬시장도 구경하면서 그 토록

말리던 빠징코도 즐겨하기도 한다고 했다. 먼지 자욱한 서재를 정리하고 옛적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도 했다.

 

참 말쑥한 일본인중의 일본인인 핫토리는 부인도 간사이대학을 나온 수재로서 남못지 않은 미모를

가진 현모양처형 여인이었다. 어느 핸가 겨울에 신혼시절의 그 친구네 집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일본에는 여간 친밀한 인연이 아니면 집에 초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것이 일본문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미토모에 입사한 핫토리는 이노우에라는 캠퍼스 커플과 결혼해서 키타센리라는

오사카시 변두리에 살고 있었는 데 내 기억에는 自家가 아니고 회사의 사택 같은 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5평이나 될까 답답하리 만큼 좁은 다다미 방이었다. 화장실도 커텐으로 분리 되어 있고 식당겸 침실로

사용하고 있는 바닥에 사각판이 놓이고 그 아래 전기난방이 붙어있어 서로 발을  주욱 뻗치고 앉으면

여간 따뜻하지가 않다. 나이 먹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고유명사가 있다.

그런데도 부부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때 핫토리와 나와의 나이가 동갑이었으나 나는 왕십리에서

28평의 아파트에 살 때 였으니 자못 비교감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평화로웠다.

 

저녁을 먹고 느닷없이 끌려 온 방문이라 어리둥절 앉아 있는데 부인이 과일과 맥주를 준비해 오고 상냥한 웃음으로

시종일관 분위기를 피워주고 있었고,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손님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데 오로지 부인 혼자만이

무릎을 꿇어 앉아 접빈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취객이 편하게 앉으시라고 지청구를 넣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삼성각이나 성북옥에서 외국인 접대할 때 도우미들이 한복으로 차려 입고 옆에 앉아 술을 따르는 모습은

보았어도 사가에서 그 것도 외국에서 이런 모습을 보니 생경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 것도 일본 문화였다

 

그 깔끔하고 말끔했던 핫토리가 졸혼을 했다하니 빙그레 미소가 피어 오른다.

아내의 여생을 존중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이들 모두 성가를 하고 새끼들 조롱조롱 달렸으니 만족하고

백수가 되어 서로 부대끼니 이제 서로의 삶을 자유롭게 살기로 했다고 한다. 이따금 어떻게 사냐고 안부인사도

나누고 건강도 헤아리면서 그리 산다고 했다. 주말 여행으로 홍콩과 서울을 찾는다고 했다.

오랫만에 조우하는 나의 친구. 그리고 참 편하다고 했다.

 

반 졸혼 상태의 아내가 서울에서 온다. 일년의 반은 서울에서 지내는 아내, 나도 아내의 삶을 존중하기로 했다.

야릇한 긴장이 있지만 빛이 많이 바랬다. 그리고 참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