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인류의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대쟁투 사관(大箏鬪 史觀)’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관에 입각해 보면 선과 악의 두 축이 등장하는데, 한 축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요 그 반대 축은 그에 대적하는 ‘사탄, 옛 뱀, 마귀, 악령’의 세력이다. 다시 말해 ‘사탄’의 존재가 없이는 성경이라는 책의 스토리가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탄’, 즉 ‘악령’에 관한 정보와 지식은 너무나 막연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탄의 세력과 그 정체를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미신적인 공포심이나 막연한 불안에 빠져들 일도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적 마귀’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진리와 우리네 인생이 맞닥뜨리는 온갖 문제와 고민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에 이르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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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는 인간은 사용하는 도구에 안전장치를 부착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칼에 손잡이를 달아 손가락을 보호한다.우리는 권총이 실수로 발사되는 것을 안전장치로 방지한다. 우리는 전기 배선이 과부하 되지 않도록 퓨즈나 회로 차단기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로봇처럼 고도로 정교한 것을 만들어 낼 만큼 기술이 발달한 사회는 로봇에 적절한 안전장치를 부착한다는 결론이 매우 당연해 보인다. 이 안전장치는 로봇의 두뇌 속에 심겨진 기본적 지침으로 로봇은 명령에 불복종할 수없게 되어 있다.아시모프의 로봇의 안전성에 대한 전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향한 난해한 질문들과 병행된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과연 그분이 마귀를 창조하셨는가? 만약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았다면 누가 그랬을까? 죄와 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요, 하나님은 마귀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루시퍼(루스벨이라고도 함.)를 창조하셨는데, 루시퍼가 변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이러한 대답은 그 문제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는 못하며, 우리로 다시 아시모프의 로봇 공학의 3원칙을 생각해 보게끔 한다.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발명품에 안전장치를 부착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루시퍼에게 내재된 ‘안전한 특성’을 부여하여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유혹에 끄떡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을까?
완벽한 안전에는 자유가 없다
가장 큰 딜레마는 로봇이 이론적으로 안전하게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로봇이라는 말은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유래되었는데 ‘강요된 작업이나 의무적인 봉사’라는 뜻으로, 농노 제도법에 의해 토지에 예속된 소작인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 강제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농노나 노예, 죄수)은 자연스레 가능한 적게 일함으로써 그들의 속박 상태에 대하여 저항한다. 이는 적대감에서 비롯되며 여러 소극적 방법으로 그들의 주인을 고의로 방해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최소한도로 하는 내키지 않는 협력을 ‘소극적 공격’이라고 부른다.우리는 강요된 순종을 해야 할 때, 그것을 아주 싫어하게 된다. 이러한 노예 상태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다만 증오로 향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로봇 같은 관계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시며, 우리 또한 사랑하는 이들과 결코 그러한 관계이고 싶지 않다. 그분은 계획적으로 짜여진 감정이 없는 복종이나, 내키지 않아 소극적으로 공격하는 저항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루시퍼를 자신의 고유한 의지가 없는 로봇처럼 만들기보다, 그에게 자유를 주셨되 듬뿍 주셨다. “(루시퍼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루시퍼를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어디에서부터인가 루시퍼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유를 가지고 그의 창조주를 대적하는 것으로 돌아섰으며, 그 결과는 “(그에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에스겔 28장 12~15절). 로봇이라면 이렇게 할 수가 없다.
루시퍼가 마귀를 만들어냈는가?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마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면, 루시퍼가 어떻게든 마귀를 만들어 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루시퍼가 가졌던 모든 것과 루시퍼 존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사탄이나 마귀는 새로운 종류의 존재가 아니며, ‘실패한 존재’ 즉 죄로 인해 파괴되고 훼손된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마귀가 죄를 만들어 냈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그러면 죄와 악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어둠과 추위와 죽음과 같은 장소에서 왔다.수년 전, 나는 신문 사진 현상소를 방문했다. 암실 출입문 위로 붉은색 등이 암실 내 불이 꺼져 있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바로 이 붉은색 등 밑 표시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곳은 암실입니다. 붉은색 등이 켜져 있는 동안은 이 문을 열지 마세요. 만약 문을 열면, 모든 어둠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웃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어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불이 꺼진 상태를 유지하면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조그마한 양초 하나가 칠흑같이 어두운 방을 밝힐 수 있다. 밤중에 성냥불을 켜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다.사실, 이러한 어둠과 추위와 죄 모두 반대적 의미나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어두운 장소를 밝히기 위하여 전구를 살 수 있지만, 밝은 장소를 어둡게 하기 위하여 ‘어두운 전구’를 사지 않는다. 그냥 빛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면 된다. 우리는 불을 피워 추운 장소를 따뜻하게 할 수 있지만, 무언가를 차게 하려 할 때는 따뜻함을 없애면 된다.
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가 빛의 부재를 나타낸다면, 죄는 무엇의 부재를 나타내고 있을까? 어떤 이들은 ‘순종’이라고 답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로봇은 순종하지만 의로워질 수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음’이라 말할 수 있으며 믿음의 부재를 ‘의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좀 더 가까운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저 ‘믿는 것’만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진리에 대하여 단순히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 또한 충분치 않은 것은, 우리는 심지어 귀신들도 믿고 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야고보서 2장 19절 참조).믿음은 또 ‘완전한 신뢰 또한 확신’을 뜻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 온 의미이다.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시편 40편 4절 참조). 신뢰는 하나님과의 건강하고, 살아 있으며,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불신과 의심은 믿지 않고 의혹을 품는다는 점에서, 신뢰가 없어지고 난 후 남아 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정해 주신 길을 신뢰하는 것을 멈추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을 때, 하나님의 정부에 대하여 의혹을 품기 시작하였을 때 마귀가 되었다. 불신, 의심, 의혹을 볼 때 우리는 ‘악’이라 부르는 공허를 깨달을 수 있다. 이 공허는 항상 존재해 왔다. 루시퍼는 공허를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그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존재이다. 그는 죽음을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다만 생명이신 하나님을 버렸을 뿐이다. 그는 어둠을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다만 빛을 거절했을 뿐이다. 그는 추위를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다만 따뜻함에서 떠나왔을 뿐이다.하나님은 루시퍼를 ‘빛을 가진 자’로 창조하셨지만, 루시퍼는 어둠의 왕자가 되기 위하여 빛이신 그분을 버렸으며, ‘아침의 아들’은 밤의 통치자가 되었다.
가장 광명한 천사가 되는 대신 그는 가장 어두운 마귀가 되고 말았다(이사야 14장 12절 참조). 루시퍼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우리의 사랑의 응답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다. 사랑은 계획적으로 짜여질 수 없으며, 그것은 자유롭게 주어지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사랑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반역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그 값을 치르고자 하셨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멸시할 것을 이미 아시면서도 말이다. 우리의 사랑을 확보하는 것은 그분의 독생자의 고난과 죽음을 요구할 것을 모두 아시면서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 고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마음 즉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다.루시퍼는 자신의 자유를 반역하는 데 사용하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였다면, 지금 얼마나 영화롭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러나 그 대신 루시퍼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였고, 우리가 마귀라고 부르는 슬픈 파괴물이 되고 말았으며, 온 우주와 함께 그의 비극을 나누고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확실히 시인은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의 모든 슬픈 말과 글 중 제일 서글픈 것은 ‘그럴 수도 있었는데’인 것을”(존 그린리프 휘티어,‘Maud Muller’).“로봇은 인간을 해치거나, 혹은 행동하지 않음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로봇 공학의 3원칙 중 제1원칙이다. 널리 인기 있는 과학 소설은 보통 로봇들이 미쳐 날뛰거나 그들을 만든 인간을 공격하는 것으로 표현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아시모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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