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 요리사가 된 기분
“점심 뭐 해 줄까?” 물음과 동시에 작은딸은 “자장면!” 큰딸은 “쫄면!” 그럼 나는 있는 재료로 뚝딱 만들고, 아이들은 저마다 점수를 매기며 맛있게 먹는다. 이 광경은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한다. 아마도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자유로운 피아노 교사인 나는 아이들의 삼시 세끼(학교에 가는 시간이 아니라면)는 내가 꼭 차려 주겠노라고 다짐했었고 지금까지도 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 덕분에 아이들은 외식보다는 나의 음식을 좋아하고, 생일 파티나 친구 초대도 집에서 하고 싶어 하며 엄마의 음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 집은 때로는 아이들 친구들로, 교회 학생이나 어른들로, 아니면 친척들로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새로운 요리를 맛보고 가져가고 싶어 하는 동생도, 요리법을 알고 싶어 하는 친구도, 추천 요리를 배우고 싶은 집사님들도 내게는 요리의 원동력이고 행복의 원천이다. 가까이에 사는 조카 연규는 우리 집에 올 때면 “이모가 오늘은 또 어떤 음식을 해 줄까?” 하며 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이거 정말 이모가 만드신 게 맞아요?” 하며 연신 먹는 모습은 내가 마치 일류 요리사가 된 느낌이 들게 한다.
건강 요리에 대한 열정
나의 아이들은 영아 때부터 내가 여러 요리책을 보고 연구해서 만든 ‘나만의 요리’를 먹으며 자랐다. 이유식부터 간식, 식사 등 다양한 건강 요리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키도 크고, 건강하며, 성격도 밝고, 명랑하며, 이해심 많은 아이로 자랐다. 나는 먹는 것이 단순하게 에너지나 건강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가족에게 어떤 음식을 해 줄까’를 고민한다. 이런 고민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어느 날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요리 강사였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3년 전 건강 요리 동우회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 요리 실습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 참여하면서 계속 건강 요리에 대한 관심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약식동원 연구소에서 이숙연 교수님과 홍순애 쉐프 님을 만났고, 그 만남은 내가 요리를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나는 하늘이 준 천연식 재료들을 일체 다른 인공 첨가물 없이 요리로 만들어 소개하는 일이 내 사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 연구소를 통해서 건강 요리 강사로 태강삼육초등학교에 파견된 것이다. 아이들과의 새로운 만남!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흥미롭고 즐겁게 건강한 식습관을 형성시켜 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아이들과 우리 가족들과는 다르게 야채를 너무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아 요즘 나는 매 순간 고민하며 요리를 연구한다. 마치 내 아이의 건강을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요리 교실의 아이들이 건강한 음식을 바탕으로 우리의 밝은 미래가 되길 바라고 믿는다. 이 작은 소망과 믿음이 내가 지치지 않고 요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는 힘이요 내 행복의 원천이다.
내 삶의 에너지 02 “그럼, 나는 누구의 딸일까?”
어느 날 오후, 아이들을 재우려고 누웠는데 금방 잠이 오지 않았는지 은총이가 어느새 내 배 위로 올라와 “빵빵” 하며 비행기며 자동차를 타고 한참을 놀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친정 엄마는 꽤나 무거운 아이의 움직임에 신음(?)하던 딸의 편을 들어 주시려 “은총아. 엄마는 할머니 딸이야. 괴롭히지 마.”라고 하셨다. 은총이는 빙긋이 웃고만 있는데 혼자서 조용히 놀던 은하가 그 말을 듣더니 “은총이가 울려고 그런다.” 하며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은하야. 은총이 안 울어. 괜찮아.” 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그럼, 나는 누구의 딸일까?” 하는 것이었다. 33개월 된 어린아이의 마음에도 자신의 근원에 대한 불확실성에 눈물이 터져 나오는 때가 있다니….새삼 놀랐다. 5년 전, 대학원 논문 학기에 쌍둥이를 임신하고 바로 이듬해에 첫 목회지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난생 처음 목회자의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부여받았던 그때, 낯선 환경과 해야만 하는 수많은 목록 앞에서 그저 쩔쩔매며 울곤 했던 그때, 아침마다 되뇌던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누가복음 3장 38절)라는 구절이 갑자기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족보상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생소한 인물들의 나열. 그리고 그 끝에 계시는 하나님. 끝도 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선조들의 이름 끝에 하나님을 발견하고는 ‘유레카!’ 외치듯 깨달았다.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듯 내 아버지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은하, 은총이가 커 가면서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엄마, 난 하늘나라에 가면 기린을 탈 거예요.” “왜?” “포도를 따 먹으려면 기린처럼 키가 커~야 해요.” “맞다!” 하루는 은하가 하늘에는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무화과나무가 있을 거라고 말하자 은총이가 이런 대답을 했다. “하늘에는 십자가 나무도 있어.” 십자가 나무. 아마도 아이 생각에 십자가는 나무(wood)로 만들어졌으니 십자가 나무(tree)도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다.솔 벨로우(Saul Bellow)가 말했듯 “모든 사람은 고아로 태어난다.” 육신의 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저마다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괴로움과 상실이 매 순간 우리를 고아로 만든다. “그럼, 나는 누구의 딸일까?”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고통의 순간 앞에서, 혹은 누구도 해결하거나 위로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할 때, 때로는 일상에 지쳐 주위를 둘러봐도 쉴 곳 하나 찾을 수 없을 때, 내가 누구의 자녀인지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온 세상과 우주의 주인 되시는 생명의 왕께서 나의 친아버지라고 생각하면 힘이 번쩍 솟지 않겠는가? 정 힘이 안 날 때는 이렇게 외쳐 보자. 지난가을, 어느 공연을 본 후 틈이 날 때마다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외치는 은하, 은총이처럼! “힘내! 힘내! 하나님은 우리 편!”
내 삶의 에너지 03 회색 인생? 회생 인생!
텅 빈 집
13살 무렵의 어느 날, 학교 수업이 끝날 즈음 난 매우 긴장해 있었다. 평상시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한 패거리와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다. 뭣 때문에 싸웠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날의 흥분 상태와 감정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들은 날 의도적으로 따돌리는 아주 나쁜 아이들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앞문으로 나가, 신발을 갈아 신고 잽싸게 옆 건물 출구로 나가야지. 그럼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온통 수업 끝난 이후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 집중했다. 수업 내용은 내겐 영화의 배경음악이나 다름없었다. 살고 싶었다. 걸리면 죽도록 맞을지도 모르니까.종이 울렸다. 난 잽싸게 앞문으로 튀어 나가 신발을 갈아 신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온몸의 혈액은 아드레날린으로 가득했다. 두뇌는 마구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옆 건물에 진입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휴~살았구나.’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옆 건물 출구를 통해 학교 정문으로 내달렸다. ‘앞에 보이는 코너만 돌면 살 수 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모서리를 돌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렸다. 히죽히죽 웃는 그들이 거기 있었다. 그날 따라 햇빛은 유난히 차가웠다. 다행히도 다리를 절룩거릴 정도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가는 동안 끊임없이 나오던 눈물.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끗힐끗 쳐다본다. 갑자기 지나가던 동급생이 한 말이 생각났다. ‘야, 대충대충 해! 애 잡지 말고. 그러다 병신 될라.’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텅 빈집. 엄마는 일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빠는 우리를 버리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웠다. 따듯한 엄마 품이. 내 마음을 다 알아주고, 도닥거려 줄 엄마 품이.
창살 없는 감옥
살면서 제일 힘든 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일. 내 마음 깊숙한 곳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일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은 내게 창살 없는 감옥 그 자체였다. 재미없는 수업, 지루한 교과목 그리고 내가 어떤 아이인지는 관심도 없는 친구들. 직접적으로 왕따를 당하진 않았으나, 소위 말하는 은따(은근한 따돌림)나 다름없었다. 난 이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으로 말해야지라고 다짐해도 막상 엄마가 오면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나와 누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홀로 하루 10시간 이상을 일하고 오는 우리 엄마. 그렇게 집에만 돌아오면 소리 없이 앓아눕던 우리 엄마. 내가 뭐든지 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우리 엄마.만약 누군가 내 인생을 색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난 곧바로 ‘내 인생은 회색이오!’라고 답했을 것이다. 칙칙하고, 무미건조하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회색. 행복? 행복이란 감정은 마치 내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신은 행복하시오?”라고 묻는다면, 난 단연코 “No!”를 외치다 못해, 울부짖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내게 사치일 뿐이었다. 어렵기만 했던 가정 환경. 초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중·고등학교 친구들. 파편적인 인간관계라고 느껴졌던 대학. 모순투성이처럼 보였던 군대까지. 내 인생의 캔버스는 그렇게 회색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 캔버스 색깔이 점점 밝은 톤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전역 후 다시 교회를 나간 뒤부터였다.
천사를 보다
당시 나는 누군가 내게 가까이 오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교회 사람들과 겉으로는 웃을지라도, 속마음은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난 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 그저 지나가는 행인이지 않을까? 내게는 절대 누군가 가까이 올 수 없을 거라 믿었다.난 그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내 과거가, 내 기억이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끝없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만큼 나의 관계에 대한 상처는 꽤 깊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누군가로부터 깊은 동정과 위로를 받고 싶었다. “괜찮아, 너에겐 내가 있잖니?”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난 많이 지쳐 있었다.내가 하나님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가 처절하게 힘들어서, 힘들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바로 그때.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밑바닥까지 가 있던 내 심정을 그분은 매우 잘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의 깊은 위로와 동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고는 정말로 한 사람을 내게 보내셨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마음과 미소를 가진 천사로 말이다. 회색 같던 내 인생이 점점 화사해진 것은 바로 그녀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였다. 곪고, 곪아 더 이상 곪을 데도 없었던 내 상처가 그녀의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조금씩 치유되어 갔다. 그녀는 마치 진공청소기마냥 내 모든 상처를 빨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어느새 내 마음밭에는 새 살이 돋아나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난 혼자가 아니었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 나를 깊이 이해해 준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 환전될 수도, 되지도 않는 그런 것이다.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심리적인 거리를 말한다. 이제 난 그 말의 의미를 진정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내게 전하고 싶으셨고, 너무나 기막힌 타이밍에 나를 인도하셨다. 그분은 항상 내 옆에 계신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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