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어에 반짝이는 까만 구두가 꿈결처럼 미끄러져 간다. 은은한 조명은 마주 잡은 두 손을 은근히 땀에 젖게하고 두 사람의 호흡도 점점 가빠지기도 하며 밀착한 두 몸은 허공을 돌며 왈츠의 풍모로 시간에 잠겨 가기도 한다. 끈적한 음악이 끝나자 차차차 리듬이 이어지고 날렵한 두 몸이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밤이 이윽토록 꾼들의 환락은 이어지고 땀을 훔치며 자리에 앉은 새벽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든다. 아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플로어의 스텝이 내일을 기약하고.
밤을 사냥하는 이들이 득실대는 동천동 일대에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 1층에 댄스학원을 차려 놓고 낮에는 제자들의 스텝을 하얀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려 가며 가르침에 열정적이었고 발을 밟아가며 길러 낸 제자들을 밤에는 실전에 투입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캬바레로 현장교육을 가는 도전적 춤선생이었다. 그래서 그날 그날 배운 스텝들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다가 실습을 하니 제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빛나는 결과 때문에 그 업적이 소문에 소문을 업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댄스학원에는 원생들이 들끓었다 한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학원이 번창하자 명예와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캬바레 밤무대의 황제로 소문이 나자 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고 정신이 돈 몇몇의 여인이 그의 주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花蛇의 붉은 혀는 판단력을 상실할 정도로 요염했고 달콤하기가 단술 같았다. 환락의 밤은 꿈처럼 이어지고 정신줄을 놓은 시간도 세월을 잊어 버렸다. 그러자 어느 때 부터인가 새벽이 되면 늘 검은 안경이 그림자처럼 주위에 어른거렸고 불혹不惑의 나이에도 미혹迷惑하여 그져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설마설마 하면서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형무소 문을 나서는 그의 몰골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간통죄로 일년여를 복역한 그의 자태는 우리들의 댄스의 제왕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초췌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마누라야 구치소에 입소한 그날 두 아이를 안고 집을 나갔고 몇몇 세간살이만 남은 집구석에 들어서자 우리의 댄스의 제왕은 맥을 놓고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로 들리는 소문에는 포항에서 건어물을 한다는 이들도 있었고 조금씩 돈이 모이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간간히 밤무대도 뛴다고 귀뜀을 해주는 이도 있었다고 했다.
아는 형이 점심을 먹자 해서 황성에서 유명한 중국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저 만치 하얀 양복에 빨간 구두를 신은 노신사 옆에 아는 형이 손을 들었다. 자리에 앉자 그 동안 간간이 말로만 듣던 80이 넘은 전설의 춤의 제왕을 내게 웃으며 소개하여 주었다. 흘러 간 옛 영화배우를 만나듯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워서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며 손을 잡는데 과연 그 손길이 역전의 춤꾼답게 부드러운 느낌은 내 기분탓도 있었을까 어쨌던 묘하고 생소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 같은 딸깍발이야 춤 같은 것은 도저히 정서적으로 수용이 안 되고 이물질 같은 것이어서 그져 강 건너 불구경하는 정도라 하겠다. 주문한 얼큰한 해물짬뽕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염색을 한 까만 머리에 반질한 구두는 예나 지금이나 빛나고 있었지만 쭈그러진 주름사이로 간간히 배어나오는 세월의 여담은 철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독거노인으로 혼자 살면서도 옛날의 영화를 무용담처럼 뱉어내는 그의 긴 희망과 꿈은 어디쯤에서 끝이날까. 짬뽕의 남은 국물을 후르륵 마시는 얼굴의 땀이 비릿하게 흘러내렸다. 참 웃기는 짬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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