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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by 은빛지붕 2020. 5. 31.

 


“일곱 번 정도면 되겠죠.”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을 때 그는 필시 칭찬받을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윤리가 팽배했던 당대 문화권에서, 

정죄하지 않을뿐더러 죄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 

스승의 가르침에 ‘모범생’ 베드로는 크게 선심을 썼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가진 완전성에 의미를 둔다면 그는 자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설마 이 숫자들을 곱해 490번이라는 의미일까. 사는 동안 쭉 용서하고 살라는 초청이니, 

그야말로 기독교는 무한 사랑의 종교다.

그런데 유대교와 갈라서게 되는 이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이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의 ‘일상용어’가 되면서, 

우리가 범하는 큰 잘못이 있다. 그 잘못을 제일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영화 ‘밀양’의 교도소 장면이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여 제 마음이 이렇게 평안합니다. 

자매님도 그리스도를 알게 되셨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주 안에서 참 평강을 누리십시오.”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세상 편안한 얼굴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하러 나선 길이었다. 

제 자식 죽인 살인자를 어찌 쉽게 용서할까. 과실치사도 아니었다. 

물론 돈 좀 있는 이혼녀 행세를 하고 다닌 자신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목돈을 노리고 아이를 유괴·살인한 사람의 잘못에 비할까. 

외아들을 잃고 울고 분노하고 구르고 미쳐서 지낸 날들이 길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가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듯 피차 용서하고 살라는 가르침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어렵게 먹은 마음이었다. 가는 길에 눈에 띈 하얀 들꽃도 한 다발 꺾어 준비했다. 

교도소 안에는 꽃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애써 얻은 마음을 품고 대면한 살인자가 너무나 평안한 얼굴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논한다. 자신은 ‘이미’ 용서를 받았단다. 

충격을 받은 신애는 교도소를 박차고 나와 비틀비틀 걷다가 쓰러졌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며 엇나가는 행동을 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구 마음대로 용서를 해.”

신애가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살인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효력 없다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용서가 ‘순간적으로 한 번에’ 받는 일인 줄 착각한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용서와 신자와 이웃과의 용서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이다. 

죄인은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이미’ 용서받았지만, ‘아직’ 남은 과제가 있다. 

자신이 죄를 지은 이웃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용서는 즉각적으로 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을 인간인 네가 무슨 교만함으로 더디 용서하느냐 핀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 마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준비되지 않은 상한 심령에 

폭력적으로 강권해 들어가 용서를 종용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했듯이 먼저 그에게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태도가 간절하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한 잘못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구체적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의 마음이 열리기를. 그가 과거 나의 부족함과 부정의를 용서해주기를. 

무엇보다 기다리는 동안 나의 삶은 달라져야 한다. 내 이웃을 상하게 했던 이전의 잘못은 그치는 삶이어야 한다. 

내 삶의 방식을 돌이킴, 즉 회개의 삶을 살아내며 기다려야 한다. 

최근 안팎으로 들리는 ‘용서’라는 말에 가져본 묵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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