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과학은 사람들에게 오래 기다리던 낙원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 인류의
미래는 가히 밝지 않다. 환경 위기, 빈곤, 점증하는 싸움과 자원의 고갈, 치명적 역병, 도덕의 문란은 지구의 미래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요즈음 과학은 세상이 유한하다고 선언한다. 먼 미래에는 모든 것, 심지어 우주 자체도 파멸할
운명이라고 주장한다. “빅뱅(Big Bang)으로 생겨난 우주는 계속 팽창하든지 수축하든지 궁극적 파멸은 확실하다.”고
예견한다. 수십 억 년 후 우리의 태양은 팽창하여 지구를 완전히 집어삼킬 것이다. 결국에는 태양도 죽고, 지구도 죽고,
종국에는 우주 자체도 죽는다. 유명한 행성 연구가 칼세이건의 단언이다. 그러나 사람은 과학이 예견하는 멸망을
벗어날 능력도 수단도 없다. 과학은 하나님을 배제했다.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넓은 우주 어디에도 우리가 도움을
호소할 인격적 존재, 우리의 처지를 동정할 자비로운 신은 없다. 우리가 자녀로서 돌봄과 도움 속에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전지하고 전능한 초월적 존재는 없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꾸려나가야 한다. 자신의 제한적 지성으로 하나님 없는
우주에서 그의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구덩이에 빠져 있지만 인류가 절망하는 소리를 들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
궁극적 파멸은 확실하다. 그리고 우주에는 냉혹한 비인격적 세력들과 눈먼 자연법칙들만 있을뿐 우리를 돌보는 존재는
없다. 소름끼치는 전망이다. 과학은 그렇게 예견한다.
기독교를 무너뜨리려면
예수는 자신이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러 왔다고 선언했다.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약속했다. 죽은 자에게는 부활을 약속했다. 영원한 행복의 낙원인 하늘로 우리를 데려
가겠다고 말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를 돌보시는 무궁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소개했다. 우리가 예수의 이런
주장을 믿을 수 있을까? 예수를 믿는 종교인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위 여부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해 온 노력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C. S. 루이스는 20세기 영국의 으뜸가는 기독교 변증가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모들린 컬리지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친 그는 원래는 기독교를 배척하고 저항한 사람으로서 한때 하나님을“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다가 골수
무신론자였던 바로 그가“사복음서의 역사성(歷史性)에 대한 증거가 놀랍도록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톨시엔 교수가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과 부활의 역사성에 관한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자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조쉬 맥도웰 교수는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도 처음에는 반대자로 시작했다. 그는 여러해 증거를 조사했다. 결국 그는, “맥도월 교수, 왜 지성적으로 기독교를
반박하지 못합니까?”라는 질문에“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지요. 나는 역사의 한 사건, 즉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마이클 그린은 두 유대인 저술가를 인용하는데, 그들은 부활을 연구한 후에
그것은“역사적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로스 클리포드는 부활에 대한 증거를 조사한 정상급 변호사들의 증언을
취합했다. 시몬 그린리프는 하버드 법대 교수로서“증거의 규칙에 관한 논문"이라는 권위적인 고전을 썼는데,
그 논문은 지금도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는 앞의 저술의 원칙들을 적용하여“법정에 적용되는 증거의 규칙에
의거하여 조사한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이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증인들”(사복음서 기자들)을 가장 엄격하게
시험했다. 그들의 형식과 문체가 달랐다. 그들의 증언이 약간 상이점은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 사이에 아무런
공모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지성적인 배심원이라면 부활을 지지하는 평결을 내릴 것이라고
그린리프는 결론을 내렸다.
예수의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 삶에서 불확실성과 절망적 전망을 제거한다. 죽음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 아님을
보증한다. 우리를 돌보시는 초월적 존재가 계심을 알려 준다. 내세가 있다. 우주는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분이
계시기에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태리 로마 지하 옛 무덤인 카타콤에서 우리는 슬픔과
절망의 비문을 볼 수 있다. 비기독교인의 무덤에는“나의 사랑하는 자여, 영원히 안녕.”이라고 쓰여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무덤에는“나의 귀한 자여,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아침에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고 쓰여 있다.
기독교인에게 죽음은 한 무덤의 비문처럼“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잠시 묵어가는 여관”일 뿐이다.
신뢰의 확인, 존재와 사랑의 깨달음
예수의 제자들은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예수 없이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절망에 빠졌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유령으로 알고 공포에 질린 그 순간 하나님
은 번갯불로 예수의 얼굴을 비추어 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신뢰하는
예수를 본 순간 제자들의 공포와 절망은 사라지고 평화와 안식과 확신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어떤 면에서 이야기 속의 아이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제자들과 예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예견하는 밤에,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끼며 무서움에 떠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아버지보다 더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고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심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믿음의 레이더로 그분을 볼 수 있다.
그 순간 우리의 공포는 사라지고 안도와 평안이 몰려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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