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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혹시 ‘언어도단적’ 배우자?

by 은빛지붕 2023. 6. 23.

 

 

빈번하게 점심 혹은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 전화로 사적인 대화를 자주 나눈다. 둘이 차를 타고 다닌다. 

이메일로 자주 작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자주 선물을 주고받는다. 자주 함께 야외로 나간다. 

부부 문제와 관련한 사적인 문제들을 논한다. 이런 일들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건강한 결혼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 친구나 직장에서 이성 직원과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이런 일을 눈치채면 배우자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당부한다. 하지만 자신을 숨막히게 한다느니,

자신을 못 믿어서 문제라느니, 남의 기분을 잘 몰라준다느니 혹은 당신의 마음이 불안정해서 탈이라느니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그런 행위를 용인해 달라고 요구한다. 로라 슐레징어는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였던 <십계명:일상 생활에

하나님의 율법의 의미>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요구를 “언어도단”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의 생애와 마음과 심령에 고통과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정을 가져다 주는 그런

방식으로 결코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는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람과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

만들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사이버 상에서 서슴없이 깊은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만나고 그리고 결국 성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이버 공간에서 앞에 말한 것과 비슷한 언어도단의 행위,

감히 배우자 앞에서는 엄두도 못 내거나 숨어서 할 일들이 버젓이 행해지는 것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폐기해도 좋을 계명은?
성경 출애굽기 20장 3~10절에는 십계명이 나온다. 십계명 중 뒤의 여섯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다섯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존중)하라”이다. 여섯째 계명은“살인하지 말지니라”로서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일곱째 계명은“간음하지 말지니라”로서 부부관계와 가정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여덟째 계명은“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서 다른 사람의 재산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아홉째 계명은“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로서 정직성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열째 계명은“탐내지 말지니라”로서 소유의 경계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 즉 이웃 집의 아내나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의 경계 밖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여섯 계명 가운데서 오늘날 없어져도 좋을

계명이 있을까? 없어져도 사회와 개인의 안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계명은 어떤 계명일까?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더니 놀랍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이“간음하지 말지니라”라는 일곱째 계명을

지목했다. 아마도 성적으로 허용적이고 개방적이고 다소 문란한 이 시대에 이 계명의 존재가 많은 사람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이 계명을 폐지한다면 부부가 더 행복해지고 가정이 더 공고해지고 사회가 더욱 안정이

될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혼외 성행위가 따분한 일상에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남편이나 아내에게 불만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계명을 범했을 때 발생하는

치명적 결과들을 안다.간음은 가정의 안정을 깨뜨린다. 부부는 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며 가정 해체에 직면한다.

당사자들은 수많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자녀들은 아픔과 방황 등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른다.

간음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일시적 쾌락의 수백, 수천 배 쓴 고통과 눈물을 관계된 사람들에게 안겨준다.

이혼의 사회적 여파는 엄청나다. 이 계명의 위반은 순결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를 거역하는

행위이다. 배우자의 기쁨과 행복과 삶을 파멸시키는 일종의 살인 행위이다. 아내나 남편의 가장 소중한 것 즉 배우자의

애정과 몸을 빼앗아가는 일종의 절도 행위이다. 계속적 헌신과 충성에 대한 서약을 어기고 행위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타인의 소유인 아내나 남편을 탐낸 것이다. “간음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은 모든 다른 계명을

범하는 총제적인 행위인 것이다.


나의 사방 50센티미터 공간은 아내의 공간
유부남이 자신의 아내를 놔두고 처녀나 이웃의 아내를 연모한다. 어떤 사람들은 애틋한 사랑, 때늦은 사랑의 열병이라고

미화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성적 타락으로 가는 지름길이요 사랑에 병든 감상주의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사방 50센티미터 공간은 아내의 전유 공간이라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바 있다. 

운전석 옆자리 또한 아내의 자리로 일컬어진다. 이런 사적 공간이 범해지고 금단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이 오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물리적 공간 외에 아내나 남편이 차지해야 할 마음의 공간에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가득할 수도 있다.이런 행위는 부부에게 애정과 관심의 첫째 자리를 그 합법적 소유자인 배우자가 차지하도록 할 것을

명하는 성경을 범하는 행위다. 몸은 배우자와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가 있을 수도 있다.

이른바 영혼의 동반자 관계다. 일곱째 계명은 배우자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영혼의 동반자로 삼는 것을 금한다.

그것은 평생의 동반자에게서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 가는 행위다. 남편이나 아내의 애정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죄악적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내의 가슴을 깨뜨리지 말라.”고

엘렌 G. 화잇은 말한다. 경계를 잘 지키지 못하거나 경계를 넘어서면 분쟁이 일고 싸움이 일어나고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특히 부부관계에서 그렇다. 부부간의 애정과 사랑은 부부 사이로 한정되어야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


치매도 못막은 사랑
한 목회자가 신학 대학을 운영하기를 몹시 원했다. 그는 학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소원하던 학장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 아내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하자

그는 학장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아내를 돌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미련 없이 학장직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동료들이 말렸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당신의 아내는 당신이 누군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물론 아내는 내가 누군지 모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압니다.

그녀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내가 사랑하기로 약속한 내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서약에 대한 이 같은 고전적 헌신은 너무 쉽게 배우자의 신뢰를 저버리는 시대,

너무 쉽게 애정이 흔들리는 시대의 도덕적 어둠을 비추는 한줄기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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