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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낮잠

by 은빛지붕 2023. 7. 24.

 

 

 

 아내는 사실 농사일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 여러 해 시골로만 돌아다니며 목회하는 동안 농사일을 배우려고 남달리 애쓰기도했다.

그렇다 보니 참깨와 비름 잎을 분간하는 데도 세월이 한참 걸렸다. 시골 교회의 텃밭에서 전문 농사꾼인 시어머니

호미질을 눈여겨보며, 자기 말마따나“친정어머니하고 산것보다 더 긴 세월을 시어머니하고 살아서”이제는 제법

사에 문리가 트인 것 같다. 5월 5일 어린이날 즈음이 모종을 사다 심기에 제일 좋은 때라는 것쯤은 아는 것이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농사를 짓는다면 한 여남은 마지기는 거뜬히 해낼 성 싶은데 아직 그럴 형편은 

못 되고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산중에 무공해 청정채소를 대주는 조건으로 친구들 도움을 얻어 한나절

일거리되는 밭뙈기 하나를 구하게 되었다.몇 년을 묵었는지 쑥대만 무성한 것을 날 무딘 쇠스랑 한자루로 파 뒤집어서,

푸성귀를 가꿔 먹은 지 벌써 예닐곱 해가 되어가는 것 같다. 다행히 농사일을 잘 모르는 아내를 소처럼 부려먹을 수

었기 때문에 그리 큰 힘 들이지 않고 농사를 지어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한두 포기이거나 한두 고랑일망정

어린이날이면 모종 파는 집에서 한나절을 골라 모종 치고 안 심은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지 두 포기, 양배추 세 포기,

토마토 세 포기, 방울토마토 두 포기, 고추 두 고랑, 감자 두 고랑, 옥수수 한 고랑, 이것들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여는것을 보면서 아내는 눈물을 글썽일 만큼 감격하는 것이다.밭 옆에 잣나무와 낙엽송이 우거진 숲이 있어서 그늘 아래 

쉬면서 수박 먹는 맛이 일품이었는데 두어 해 전에 주인이 개간하느라고 나무를 베어 내 버렸다. 잠깐 쉴 그늘 하나 없

농사를 짓는다는 게 여간 고역스런 일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원두막 하나 못 지으랴 하고 이웃집 개간할 때 얻어둔 통나무의 공이를 깎고 껍질을 벗기느라고 일요일마

뙤약볕에 서서 아내와 함께 몇 달을 보냈다. 나무 기둥을 세우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냈는데 지붕을 얹는 게 작은 일이 

아니었다. 지붕에 닿을 만큼 얼기설기 만든 발판에 비틀거리며 올라서서 합판을 얹고 을지로에 가서 슁글까지 사다가

붕을 덮고 맨 꼭대기는 물막이를 할 재간이 없어서 양푼을 하나 엎어 놓았다.마룻바닥은 판자를 주워다 서툰 대패질로

맞춰 놓았다. 이 원두막 하나 만드는 데 듬성듬성 일요일로만 족히 반년은 걸린 것 같다. 그동안 마신 냉수만도 드럼통

하나는 족히 되리라.땡볕에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하도 닦아서 얼굴이 너무 쓰라려 밤에 오이 마사지를 하고 잔 적도

있다. 이제 원두막도 다 되어 한낮 볕 가리는 데는 그런대로 괜찮다. 팔십대 중반이 되신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이 밭에만

오면 귀퉁이마다 뭔가를 심고 풀을 매고,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살맛이 나시는 모양이다. 가물어서 빼빼 말라 맛이 쓴

상추이지만 한 줌 뜯어서 보리쌀 듬성 섞어 갓 지은 밥에 감자 두어 포기 더듬어서 끓인 감잣국에 점심을 먹고 나니

낮잠이 왜 안 올쏘냐. 삐걱거리는 원두막 한 구석씩 차지하고 한잠 자야지. 누구의 싯구던가.

여름 한낮 보내기는 낮잠이 최고인데 건너 산 잦은 뻐꾸기 소리가 선잠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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