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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끝이라는 이름의 시작

by 은빛지붕 2023. 8. 21.



몇 년 전 어느 가을, 오랜만에 장항선 열차를 탔다가 저녁의 황홀한 낙조를 목격하였다.

차창 너머에 펼쳐진 노을을 바라보면서 저녁 하늘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사실 확인과 함께,

지는 노을이 아침 햇살보다 언제나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의문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답을 낙조처럼 지던 그 해 가을의 황홀한 낙엽을 통해 얻었다. 가을이 오면 나무는 모든 생산 활동을

멈추엽록소가 분해되면서 낙엽은 시작된다. 이때 나무는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당의 분비를 증가시키는데,

이 당이 안토시아닌을 합성하여 붉은 단풍을 만들어 낸다. 한편 대부분 잎속의 양분은 줄기와 뿌리로 이동되고

잎자루나 잎 몸의 기부에 이층(離層)이라고 하는 특수한 세포층이 형성된다. 이때 엽록소의 합성은 중단되고

안토시아닌이 합성되면서 단풍이 들고 뒤에 이 이층이 발달되어 잎은 떨어지게 된다.

즉 단풍이란 나무가 스스로 몸을 낮추고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의 현상이다.

여름에는 광합성을 위해 많은 잎이 필요했지만 겨울에는 얼기 쉬운 잎을 차례로 떨구고 대신 새봄에 피어날 새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겹의 조직이 그 눈을 둘러싼다. 동시에 줄기와 뿌리도 얼지 않도록 당의 농도를 높인 결과

일시적으로 안토시아닌이 형성되고 가려졌던 여러 색소가 다양한 색으로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낙엽이다.



사람들은 지는 것보다 뜨는 것을 좋아하고, 헌 것보다는 새것을 더 좋아한다. 새해, 새봄, 새날, 새 아침, 새 사람….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 오해일 뿐이다. 이쪽에서 노을은 저쪽에서는 아침 햇살이다. 이쪽에서 동쪽은 반대쪽에선 서쪽이다. 이곳에서 지는 해는 저쪽에서는 뜨는 해이다. 세상에 새것이란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전도서 1장 9, 10절).마음이 바뀌면 새 사람이다. 졌던 해가 어두움을 털고 아침 해로 다시 뜨면 새날이듯이, 사람도

옛것을 벗어 버리고 새 마음을 받으면 새 사람이 된다. 이것이 중생(重生)이다. 유대 랍비였던 니고데모조차 그 점을

오해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한복음 3장 3~5절).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했던 한 시대의 스승 니고데모에게 조차“새로 남”이 절실했다면

우리 같은 속인들에게 중생은 얼마나 더 절실한 문제이겠는가!

 

나무는 단풍을 통해 일년 동안 축적된 노폐물을 배출한다. 이 모든 게 봄에 다시 잎을 피우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동물과 같은 배설장치가 없는 식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노폐물을 배출한다니 얼마나 놀라운 자연의

리인가? 잎을 떨어뜨려 줄기를 보호하고 처절하게 겨울을 대비하는 나무. 스스로 화장을 지우고 추위와 맞섰다가

초록을 옷 입고 의연히 다시 일어서는 나무. 그들은 끝이라는 이름의 시작을 통해 찬란한 봄으로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중생(重生)이다. 그러나 인간은“때”가 지날수록“때”가 묻는다. 문제는 인간 스스로는 이“때”를 제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얼룩은 물로 닦이고, 때는 비누로 해결되듯이, 죄는 십자가의 보혈로만 씻김을 받는다.

 

엘렌 화잇의 말을 빌린다. “죄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십자가 밑이다”(사도행적, 207).

“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희망이 걸려 있다”(초기문집, 286). “죽어 가는 죄인에게 십자가는 모든 것이다”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349).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스가랴 13장 1절).

칼 힐티는 폐부를 찌르는 말을 했다. “오늘날 기독교의 할일은 너무나 많이 껴입은 옷을 벗는 일이요, 벗기는 일이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곁으로 나아가기 전에 두껍게 껴입은 위선의 옷, 자만의 옷, 죄의 누더기를 벗어 던질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장 27절).

가을이 우리 곁에 온다. 낡은 자아를 벗어 버리고 새 생명으로 부활할 기막힌 계절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