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모음

이 가을이 더 깊어지기전에

by 은빛지붕 2023. 11. 8.

우리 집 작은 방 창가의 가을은 이미 손 쓸 수 없는 병처럼 깊어만 가고있다.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다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고 프랑스 어느 작은 마을로 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잘 살다 죽었다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배경 음악에 한참을 귀를 뺏긴다.

예수느 믿으려고 해야지 알려고 하면 않된다는데 나는 자꾸 알려고 한다.

어느새 폭염의 밑동부터 가을은 이렇게 피어오르는데,

나의 믿음은 겨울을 지나고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날수록 점점 더 쇠약해져 간다.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는,문구가 예수에 관한 책을 한 권 빌릴 때마다,

그 빌린 것을 졸린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펼칠 때마다 떠오르지만

내가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명철이 아니라 남의 명철이라 그런지

나는 자꾸만 예수의 권능보다는 사람의 명철에 기댄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왜 교회 조직을 통해서만 개인과 사귀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

성경책의 행간에 서로를 가두려고 하는 맹목의 조합에 도무지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자꾸만 사막의 수도원을 기웃거릴 뿐이다.

 

무슨 까닭인지 교회를 몆십년을 다녀도 그 성도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데 교회 건물은 커진다.

세상의 도처에서 예수께 성령 받은 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빼꼼히 열린 음식물 분리 수거통의 악취처럼 진동을 한다.

왜 예수의 성령과 동행하는 자들의 자기 검열이 등불도 없이 길을 걷는 자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만사 제껴놓고 예수만 따르면 모든 용서 되어 있는 죄들을 선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일까? 

왜 자꾸 그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가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일까?

목사가 예쁜 성도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무정란을 바라보는 측은함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 짓이야 나도 젊을때는 해보았으니, 산 사람의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어쩌랴 하겠지만,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과 성령은 서로 남남인 것일까?

 

그 성령이라는 것이 살아 계시는 예수의 일부이고, 예수께서 믿는자의 의식속에 깔아놓은

프로그램 같은 것이라면 분명 실제적인 통제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모든 것을 나쁘게만 만드는 자유의지 타령을 할 것인가? 

예수가 살아 계시다,더우기 내 안에 살아 계시다고 진실로 믿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의 의지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선택과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목사는 그 교회에서 아주 유능한 목사라고 했다. 

그는 유능한 사기꾼이였을까? 베드로처럼 새벽닭이 울기 전 이였을까?

그런 목사가 한 둘이라야 사람의, 혹은 나의 명철을 의심할텐데, 내가 칠십사년이나 써먹은인생,

나머지를 예수께 모두꼴아 박는다고 해도 아까울 것도 하나없는데 나는 자꾸 성경책을 읽지 않고

예수를 연구한 세상의 책을 읽게 된다.

 

나는 어쩐지 예배를 보면 졸던지, 눈물을 흘리던지 둘 중 하나다.

어떤 날은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 소리만 들어도 벌써 천국에 와버린 사람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그 곳이 예수의 품안인 것처럼 내 고달픔들이 다 녹아 내리는 것 같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 와 한 두 시간만 지나도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다.

이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예수와의 관계가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토리노 성의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물리 현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잘 못 된 것일까?

그런데 예수의 혈액과 알로에와 몰약의 성분이 그 남자의 형상에서 축출 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야말로 붕대를 칭칭 감은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낸 것과 같은 기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어제는 단 한 점의 고기도 먹지 않았다.

두부를 달걀에 묻혀서 구운 것을 먹었는데 달걀도 먹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죽을 때 피를 흘리지 않은, 이라는 조건에 맞는 음식이지만,

달걀을 대량 생산 해내기 위해 닭들에게 주는 비정상적인 삶의 조건들을 생각하면

날달걀로 멍든 부위를 문지르는 일도 미안해질 것 같다.

내가 식당에 밥사먹으러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는다는 사실이다. 아니다,

사실은 많이 먹는다면 아까울 것도 없는데 너무 함부로, 음식을 많이 탐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그 음식들을 자신들이 직접 잡고 조리한다면

그 죄송함으로 음식물 섭취를 위한 살생이 반으로 줄어들지도 모른다.

명절 무렵 대형 마트에서 황금색 보자기에 담겨 예쁜 리본으로 묶어놓은 고기 셑트를 풀어 보면

피흘리는 동물의 살점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놓은 상들도 얼마나 예쁘게 셋팅을 하는지

구수하고 군침 흐르는 음식 냄새에서 피 비린내는 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피비린내를 좋아 하신다.

사람의 죄를 갚기 위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어린 양을 잡으라고 하셨다.

결국 독생자의 피비린내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어디라도 상위 1%가 그럴싸하게 살듯 상위 1%의 진실이 있으리라,

절간이든 예배당이든간에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 점점 더....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가족  (0) 2023.11.10
들꽃은 염려하지 않는다  (0) 2023.11.09
파크 골프  (0) 2023.11.07
그녀의 껍데기가 아름답다면  (0) 2023.11.06
오늘은 출세했다.  (0) 202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