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모음

아버지의 가족

by 은빛지붕 2023. 11. 10.

 

 

 "아버지한테 한번 다녀와라. 또 언제 한국에 갈지 모르잖아." 

방학을 이용해 친구들과 한국 여행을 간다고 하자 어머니가 조용히 타이른 말이었다.

“미쳤어? 다른 여자하고 애까지 낳고서 사는 사람을 뭐 하러 찾아가? 기분 잡치기 싫어.”
부모님이 어떤 이유로 헤어졌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며칠 동안 어머니의 그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자꾸 신경 쓰이는 거람. 정말 짜증나 죽겠네.”
공연히 혼자 심술을 내기도 했고,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면서도 신명이 나질 않았다. “그러지 말고 다녀와.

그렇게 신경 쓰는것은 네가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뜻이야.”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큰 숙제를 해치우는 듯한 심정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오랜만이로구나.” 아버지는 나를 보자 껴안기라도 하려는 듯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나 나는 슬그머니 그 팔을 외면했다. 곁에는 어머니보다 열 살은 어려보이는 여자가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여자 아이가 거실로 나왔다. 아이는 잠깐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망설이지 않고 걸어와 내 다리를 꼭 껴안았다.  "언니야, 인사해야지.” 여자가 아이에게 말하자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나는 차마 다섯 살 꼬마의 팔까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죄 없어. 나까지 미워하진 마. 아빠하고 엄마가 헤어진데는 내 책임 없어.” 여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편하게 나를

대했다. “슈퍼에 잠깐 다녀올 테니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여자는 아버지와 내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10년 동안의 이별 그리고 아버지의 재혼. 그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다.

나는 아버지가 묻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집 안을 훑어보았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과 아기자기한 세간들.

모두 정갈했고, 질서정연했다. 그 속에 나 혼자 이방인이었다. "미안했다, 너한테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엄마한테 너 한국에 나왔다는 연락받고 외출도 않고 집에만 있었다. 혹시라도 나 없는 사이에 네가 찾아올까 봐.”

그 말이 왜 콧잔등을 시큰하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응어리처럼 얹혀 있던 것들이 그 말 한마디에

스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가겠어요. 엄마 부탁받고 온 거예요. 실은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어차피 아빠에 대한 추억도

별로 없어서 그리워한 적도 없으니까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이가 먼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여자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언니, 언니!” 아이는 달려와 내 무릎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 몸에서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무한테나 우리 언니 왔다어찌나 자랑을 늘어놓던지.

이래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나 보다. 처음 보는데도 어쩜 저렇게 좋아할까.”

여자 말을 들으며 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아이가 느닷없이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언니 가지 마. 언니 가지 마!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 언니 가지 마, 응?” 아이는 내 목을 꼭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몹시 당황했다. 나는 아이를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아이는 아니었다.

벌써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못해 저녁을 먹고, 아이와 인형놀이까지 한 뒤에야 아버지 집을 나섰다.
“언제든 와. 우린 가족이잖아.” 여자가 말했다. 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 어깨만 토닥였다.
“언니, 언제 와? 언니, 안 가면 안 돼?” 아이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물었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아이를 꼭 안았다.

그리고 아이 등을 가만히 다독여 주며 속삭였다.“잘 자라야 돼. 언니가 또 보러 올 때까지.”

그렇게 말하는데 눈 속으로 뜨거운 물기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묘약  (0) 2023.11.12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생명이었다.  (0) 2023.11.11
들꽃은 염려하지 않는다  (0) 2023.11.09
이 가을이 더 깊어지기전에  (0) 2023.11.08
파크 골프  (0) 20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