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이 저만치 보이면 완만한 언덕이 있고 오른쪽으로 10층의 자그마한 건물 6층에 나의
직장이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들어간 무역회사였는데 자수직물을 가공해서 중동아시아
지역으로 수출을 하던 국내 몇 안되는 회사였던걸로 기억한다. 나의 사수는 깡마른 강대리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위로 사람 좋은 우과장이라는 분이 계셨다. 내 동료로는 전라도에서 갓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온 꼭 환자같은 늘 파리한 얼굴을 한 미스옥이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내게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내 책상 맞은편으로는 미스김과 미스빈이 늘 상냥한 미소로 웃고
있었고 그 옆자리에 앉은 정대리는 해운담당이라 바빠도 너무 바빴다.
그 외에도 디자이너들 두 세명이 귀에 연필을 꽂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실장 허대리는
언제나 조폭 같은 근엄한 인상으로 사람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습관으로 경리 김과장에게
지청구를 받았다. ROTC출신인 유상무가 출근이라도 하면 모두가 기립을 하고 90도로 인사를
하는 진풍경이 매일 아침 벌어졌다. 기울어 가는 박통말기라 할지라도 군사정권의 서슬이
사회저변에 만연해 있었으므로 군출신이라면 졸병의 상관정도로 치부하던 시절이어서 당연
시했다. 유독 우리회사는 여직원들마져 군기가 들어 남자들이 기립하면 으례히 군기가 바짝든
훈련병 같이 꾸벅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상무가 회장의 아들이니 실권자의 앞에서는
힘 없는 백성들이야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랫만에 명동교자에 들렀다. 오전 10시에 개장인데도 9시쯤 되니 벌써 긴줄이 늘어섰다.
참 오랫만이었다. 일본인 중국인 소녀들이 깔깔대고 있었고 늙수그레한 노인들이 옛향수를
못 잊어 지친 몸을 세워 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동행이 셋이라 3층으로 가라 안내를
하니 엘리베이터가 쉽게 올려 주었다. 그 때 그 식탁에 그 때 그 마음으로 앉아서 칼국수를
기다린다. 하얀 사기그릇에 하얀 김이 오르는 칼국수가 식탁에 오르신다.
매콤하고 고소한 김치가 뒤따라 오르고 김치가 또 이 집의 일감이다.
나는 이 집의 김치가 칼국수만큼이나 정겹고 맵싸해서 좋다. 구수한 닭국물을 후후해서
한 입을 머금으면 까마득했던 옛날이 꿈처럼 달려온다.
미스 옥은 나를 오빠처럼 좋아했다. 객지에 혼자 올라와 옥수동 오빠집에서 붙어 살던 미스 옥,
우리는 틈만 나면 명동거리를 쏘아다녔다. 토요일 점심으로 명동칼국수 한 그릇씩을 뚝딱
해치우고 거리에나서면 촌놈과 촌년이 보는 명동거리는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 그 자체였다.
명동성당을 돌아 진고개쪽으로 돌면 음파사에서 진고개 신사가 흘러 나오고 사보이 호텔을
빠져나와 국립극장으로 내려서면 배호의 비내리는 명동거리가 흐느끼고 있었다.
낭만과 추억의 거리였다. 언제부턴가 손을 잡고 걷기도 했고 쓴 커피 한 잔을 놓고 개똥철학을
밤이 이윽토록 논하기도 했다. 초원의 빛 같은 나날이었다.
거리는 관광객으로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었다.
아들이 내 팔을 부축할 때쯤 내꿈은 과거로 함몰되고 있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차가운 포도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강대리와 미스옥이 저 만치 앞서 걸어간다.
이따금 미스 옥이 돌아보며 상큼한 웃음을 보낸다.
갑자기 어지러워져 아들품에 기댄다.
인생이 참 짧다며 긴 한숨을 내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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