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모음

서서 우는 나무

by 은빛지붕 2024. 12. 20.

행님요! 무지개다리 건너는데 하얀 국화가 이리도 많이 피어야 하오. 비단결에 쓰인 저 산 사람들의 수 많은 행적은 검은 피처럼 거북하구려. 이파리 이파리마다 눈물은 맺히고 하얀  동굴처럼 이승길을 지나면 오종종 젊은 유족들, 오랫만에 보는 아이들이 낯설기만 하오. 행님요! 웃지마소! 하얀머리 주름진 얼굴에 거친 껍질로 서 있는 고목이 행님이 그 토록 애꼈던 아우 아니오! 아우의 목소리가 그리도 듣고 싶었소! 그저께 허공에 뜨는 목소리로 몇 마디 주고 받은 게 우리네 마지막 대화라니 애닯고 애석하오! 그래도 참 다행이오! 행님요! 마지막으로라도 우리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 두었으니, 그리고 그 거칠고 힘든 일 줄이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제발 그곳에서는 일 들어와도 모른척하고 행님 좋아하는 꽃순이를 찾아 진종일 꽃밭에서 희희락락 노닐면서 술에 지치면 누가 뭐랄 것도 없으니 만화방창(萬化方暢) 영원한 삶을 살기를 바라오!. 그런데 마른 눈에 눈물이 주책없이 흐르는 건 행님에 대한 마지막 선물인가요? 지친 삶에 대한 넋두리인가요? 잎이 다 떨어진 가을나무가 싸늘한 벌판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댄 가을나무들이 맥 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총무가 술잔을 채워가며 지청구를 한다. 자!자! 기운들 차리시고! 두 해 선배 두 분과 동기 후배 셋이 패잔병으로 겨우 살아들 남았다. 모습을 보면 누가 먼저 후송병의 들것에 실려 나갈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고지혈증에 수시로 119 신세를 지는 선배, 얼마 전 신장을 떼어내어 설사만 줄줄 흘리는 동문. 밥 숟갈만 들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떨리는 수전증의 동문.그래도 술은 줄기차게 마신다. 저기 그윽히 웃는 행님의 영정 앞에 향불이 아른거리는 저승길을 흘금흘금 바라보면서 방향을 잃은 술잔이 정처 없이 헤매었다.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고 마주 앉아 있는 자기의 얼굴을 보면서 남은 생의 다짐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병을 싣고 살아가는 해거름의 인생들이야 무슨 계획이 있고 무슨 기쁜일이 있으랴하는 지레 포기한 인생들의 얼굴들이 조촐한 상 위에 마른 안주처럼 흩어졌다.

 

차창에 비치는 얼굴을 외면하고 보름달 같은 동그란 달과 밤하늘의 수 많은 별을 헤아린다. 별처럼 왔다 별이 되어 돌아가는 인생. 영원히 살아가는 밤하늘의 별들이 한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하는 어줍잖은 생각이 싸늘한 가을 차창을 때린다. 죽어지지 않으니 무지개 다리 건너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이 생경한 노추의 마지막 희망일까?

 

천년의 숲 고목들이 찬바람에 울고 있다. 영원의 소리로 우는 저 고목들. 서서 우는 나무가 집으로 간다. 참 가을단풍처럼 붉은 하루다.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들의 노래를 듣다  (0) 2024.12.22
슬픈 계절  (0) 2024.12.21
​대화의 기술  (0) 2024.12.19
​부고  (0) 2024.12.18
안부  (0) 202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