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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이 편한 세상

by 은빛지붕 2025. 2. 13.

 

 

고택의 하루는 폰에서 새소리를 끄집어내어 머리 맡에 앉혀 놓고 한참을 기운을 차린 다음에야 하루의 주파수를 겨우 맞춘다. 이곳 남쪽지방도 칼바람이 불고 메마른 흰눈이 햇빛에 반짝이며 흩날리더니 음지에는 제법 싸락눈이 겨울처럼 쌓여 있다. 참 보기 힘든 눈이기도 하고 날씨가 얼마나 매서운지 눈이 싸라기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 다닌다. 싸늘한 아침처럼 아침마다 두 노인의 최대난제인 식사문제가 다가오고 오늘은 또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제 먹었던 밥을 또 먹어야할 것인가. 찐고구마에 어제 갈아 놓은 야채주스를 또 훌적거려야할 것인가. 뭐 치약을 짜듯 간편하게 한꺼번에 쭈욱 짜먹으며 티브이를 볼 수 있는 그런 식품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 끼니때마다 다가오는 두 노인의 식사문제가 갈수록 난제로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노년의 일상이 권태롭기도 하지만 늙은이 둘이 마주 앉아 진수성찬을 놓고 뒤적여도 마음은 메말라 식욕이 심드렁하다.

 

그런데 비하면 요즈음은 일견 참 편한시대이기도 하다.서울의 아이들이 부모의 취향에 맞추어 시시로 보내주는 영양식들,예를들면 일회용 갈비탕, 완도 전복, 울릉도 물오징어, 만석 양념닭, 종가집 김치,심지어 생수까지도 대문 앞까지 척 갖다 놓고 인증사진을 턱 밑에 올린다. 집사람은 어떤 날은 두 세번씩 대문 앞을 들락거린다. 마트를 좋아라 했던 집사람이 판교에 살 때도 매주 마트라도 간다시면 한아름씩 들고 오기도 했던터라 폰에 기별이라도 깨톡거리면 대문 앞으로 서둘러 뛰어 나간다. 마치 아이들이 찾아온 것럼 반가운 걸음으로 달려 나가서 무거운 박스를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 시골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며 스며들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식품에 따라 냉장실행과 냉동실행으로 분리 거치를 하고 날마다 집사람의 기호대로 꺼내어 요리를 하기도 하고 데우기도 하며 끼니를 이어 가지만 메뉴란 게 거의 거기서 거기다 보니 지레 권태로움이 와서 음식맛으로 먹기도 하다가 입맛으로 쩝쩝거리기도 하다가 젖가락 끝으로 끄적이고 하다가 음식을 소홀히 대한다고 집사람에게 지청구를 당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일생을 살며 먹어온 음식들이다 보니 그 맛있던 삼계탕도 누린내만 나고 그 구수하던 라면도 밀가루 냄샌지 국물이 짜서 요즘은 입 가까이에도 못 댄다. 나이들면 확실히 입맛이 바뀌는 게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모임에 나가보면 80이 넘은 나이에도 어죽 한 그릇을 훌훌 불어가며 남은 국물마져 후딱 마시고 두 눈을 감추고 앉아 있는 노인들을 보면 약골인 내가 약골인 이유가 있구나를 절감하게 되기도 한다.

 

요즈음은 독거가정이 많고 그에 맞춘 음식및 배달 문화가 첨단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것 같다. 폰 하나면 웬만한 사람은 살아가는데 별로 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심지어 외국에 주문한 ㅂㅂㄹ코트가 일 주일을 조금 넘자 거울 앞에서 이리돌고 저리 돌고 하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참 사람은 돈 있고 오래 살면 갖은 문물을 다 경험하겠다는 생각이 피식 든다. 폰이라는 요물이 세상을 뒤집어 가고 있다. 사회적 인프라도 무섭게 변하고 있다. 너무 편해서 겁이난다.

 

우물이 동네 중앙에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사시사철 그 우물 하나에 매달렸다. 따뱅이를 물고 양철통에 넘치는 물을 피해가며 젖은 치마를 움켜쥐고 골목길을 들어오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집 안에 조그만 우물을 파기전까지 우리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교대로 물을 퍼 날랐지만 늘 물이 모자랐다. 아버지가 마당에 물길을 찾아 10자 남짓 우물을 팠을 때 아이들은 무너진 담벼락에 돌을 빼서 날라 석축을 쌓았고 이튿날 나무 두레박으로 퍼올린 맑은 우물물을 한바탕 시원하게 드신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신세계였다.

 

대문 앞에 생수가 네 박스나 왔다. 도회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생명수를 보내왔다. 부들부들 추위에 떨며 박스를 들고 허적거린다. 한겨울 내내 뗄 연탄을 쌓아 놓은 것처럼 푸근한 마음으로 다용도실에 쌓여진 생수를 본다. 바깥이 아무리 엄동설한이라도 마음은 봄바람처럼 따듯하다. 몸에 실은 지병만 없다면 정말 편한 세상이다. 너무 편한 세상이라도 지병때문에 죽을 지경인 것을 저 겨울 햇살은 알까? 남쪽지방이 북극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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