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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곽재구 ' 사평역에서

by 은빛지붕 2024. 1. 11.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시 : 곽재구 ' 사평역에서 '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에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서사적으로 구성한 소설이 하나 있는데 임철우(林哲佑) 작가의
'사평역' 이라는 단편소설입니다.

배경은 1970-80년대 가상의 시골 간이역 사평역 대합실,
중심 인물이 따로 설정되지 않고 아홉 명의 인물군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력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있습니다.

소설의 사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불을 쬐던 사람들이
역사 안팎의 사물들에 관심을 두다가 기차가 도착하자
그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처럼 간단한 서사적 사건 속에
등장인물들의 회상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그들의 회상 속에서 과정의 일들이 이야기되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주인공 없이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미친 여자, 대학생, 노인과 농부, 춘심이라는 술집 여자와 서울 여자,
그리고 대합실을 관리하는 역장 등입니다.
이들의 성격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다만 평면적으로 서술될 뿐입니다.

중년 사내는 삶이란
감옥과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언제 올 지 모를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농부는 일하고 근심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울 여자에게 삶이란
돈이며,
춘심이는 삶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대학생에게 삶은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무엇이지만,
그러한 신념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행상꾼 아낙네들은 삶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조차 사치일 뿐입니다.

이처럼 작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모아 놓고, 엄습하는 추위 속에서
자신들의 삶이 주는 의미를 반추해 보는 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 임철우의 '사평역' 소설에 나오는 사평역도 가상의 시골 간이역이지만,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의 사평역도 실재론 존재하지 않는 역입니다.
흑백사진 '사평역' 팻말도 물론 가상으로 붙여놓은 것이겠지요.

송종찬 시인의 '톱밥'이란 시 한 수 더 곁들입니다.
여여로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가구가 되지 못한 꿈들이 탄다
미송 나왕 결 고운 것들
모두 서울로 팔려나갈 때
등 굽은 양날톱에 나이테가 잘려
기러기처럼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너희들의 꿈은 얼마나 춥겠냐고

강바람이 빈속을 적시는 마을 도서관
한 뼘의 그리움도 전하지 못하는
남은 자들의 부끄럼을 태우며
지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의
목숨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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