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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삶과 만나는 순간.

by 은빛지붕 2023. 8. 15.

 최근 한 잡지에서 읽은 기사를 잊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 유명했던 한 기타리스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창 인기를 얻던 시절에는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연주 음반은 기록을 경신하며 팔려나가 엄청난

부(富)를 쌓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지긋한 왕년의 스타일 뿐인 데다, 최근에는 그동안 해 온 대규모

사업마저 부도가 난 처지였다. 수백만 달러나 하는 저택에서도 쫓겨날 처지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기자가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조금은 가혹한 요구가 아닌가 하여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물불 가리지 않는 기자 근성으로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기자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 준 것이었다. 기자가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차의 트렁크를 열어놓고

자신이 기록한 목록들을 보면서, 하나씩 짐을 옮겨 싣고 있었다. 은행으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집을 비워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가 목록들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는 17개 항목들이 적힌 종이쪽지를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기타, 마이크, 노트 등 아주 간단하고 단출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언뜻 보아도, 한 번에 그의 승용차에 모두

실을 수 있을 정도였다. “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들만 있으면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도리어 짐만 됩니다.” 실패한 왕년의 기타리스트, 그의 초라하고 불쌍해진 노년의 모습을 기사화하려고 찾아온

기자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시종 담담한 태도도 그렇거니와 그의 얼굴에서도 미련이나 아쉬움의 흔적들은 좀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연주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익숙한 몸놀림으로 떠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자는 처음의 기대와는 많이 다른 모습에, 기사의 방향마저 바꾸기로 했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업에서만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로, 그리고 인생에서는 실패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로, 아니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로 돌렸다.


시련 가운데서 만나는 삶
그런 일들은 우리에게도 느닷없이 찾아올 수 있다. 모양은 다르고 정도는 달라도,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부분이 먼저 허둥대거나 혼란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는 거지?’그리고 삶을 만나게 된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뭐야?’‘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순식간에 익숙해 있던 일의 세계가 아닌, 낯선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대학 시절 절친했던 한 친구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그는 내가 2박3일의 수련회를 떠나는 순간까지 같이 있었고,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수련회 장소까지 동행했다가

되돌아간 친구였는데…. 그 3일이 지나고 돌아갔을 때는 이미 싸늘한 몸으로 변해,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한 줌의 재로 변해 강물에 뿌려지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움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낯선 삶의

세계로 빠져들며, 고통 가운데서 삶과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되었다.‘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기억들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자주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더욱이 삶과 마주 대하는 때에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돌아보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삶과의 만남을

낯설지 않게 해준 소중한(?) 기억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기타리스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 찾아드는 하나의

확신은, 그는 이미 삶과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그리고 정면으로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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