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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찹싸알 떠억, 메미일 무욱”.

by 은빛지붕 2023. 8. 13.

목소리까지 얼어붙는 깊은 겨울밤, 골목 끝으로 누군가를 따라가는 저 목소리가 갑자기 나를 어린 시절 추억의 동

속으로 끌고 간다. 생활이 어려워서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 후 맞은 첫겨울에, 해진 검정 고무신을 신고

눈과 얼음이 범벅이 되어 얼어붙은 겨울 골목을 통금이 다 되도록 찹쌀떡을 외치고 다니다 보면 너무 춥고 발이 시려워

불자동차가 순찰 나간 소방서 빈 차고의 천장에 매달린 전등불빛 아래에만 서 있어도 한결 따뜻하게 느껴지던 열네 살의

그 춥던 겨울밤, 그 소방서 불빛에 쏟아져 내리던 함박눈이 꽃잎처럼 탐스러웠다. 십여 년 전이지만 삼년 동안 MBC

라디오에서 일요일 새벽마다“희망의 길”방송을 담당하는 행운을 누렸던 것은 그 어린 시절 몇 해 겨울을 밤 깊도록

찹쌀떡을 외치고 다니며 가다듬은 근사한(?) 목소리 덕분이었을 것이다.

큰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첫 겨울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며 어느 날 갑자기 찹쌀떡 바구니를 메고 나타났다.

“너, 그러고 다니다가 여자 친구나 후배들 만나면 어떤 헐라고 그러니?”“괜찮아요. 하나 팔아주겠죠. 고생도 좀 배우고

아빠처럼 목소리 훈련도 할겸…”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밤늦게까지 식구대로 앉아 혹시나 바람결에 찹쌀떡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이며 그렇게 며칠 밤을 지냈는데, 어느 날은 날씨가 안 좋아 많이 남았다며

바구니 채로 가지고 돌아왔다. 반품 되지 않는 것이어서 할머니를 졸라 친구분들 집에 일일이 전화를 해서 한 상자씩

팔아주는 것으로 가까스로 해결을 했다. 그런데 사흘도 안 되어 또 반 바구니를 가져온 게 아닌가?

 

할머니도 이제 염치가 없어 해결할 수 없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가 맡게 되었다. 사무실 동료들, 여기저기에 아쉬운

소리를 해서 점심 겸 먹도록 간신히 팔아 줬다. 아마 반절쯤은 제가 팔고 나머지는 가족, 친척을 동원해서 몇 주 하더니

십여 만원 넘게 이익금을 받아왔다. 그리고는 첫 월급이라며 적지 않은 식구들 모두에게 양말 한 켤레씩을 돌렸다.

할머니 양말 색깔이 좀 야하다고 제 여동생들이 놀려댔다. 세 아이 중에 씀씀이가 가장 크고 생활력도 강한(?) 둘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한 겨울을 멀리 마석까지 매일같이 가서 일하더니 내 월급에 버금가는 거금을 받아왔다.

물론 제 삼촌의 병원에서 일한 거여서 장학금 겸 준 것이겠지만, 그 돈에서 할머니 내의 한 벌에다 우리 내외에게는

부부 세트라며 털실로 짠 셔츠를 똑같은 색깔로 두 개 사왔다. 그리고는 제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나가 피자집을 다녀온

모양이다. 제일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적당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질 않았다. 다행히 대학 입학시험에과 수석을 해서 받은 장학금이 거금이라 눈치를 볼 입장은 아니었지만

당장 제 손에 현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어서 용돈이 궁한 모양이더니 이모의 도움으로 일주일에 여섯 시간 일하는

자리를 구해왔다. 한 시간에 5천 원이라니 한 달이면 12만 원이 되는 셈이라 대학 신입생으로는 적당한 액수라고

더니 턱없이 모자란다고 엄살이다. 막내가 첫 월급을 타오던 날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나가는데 

막내가 봉투를 하나 내밀며 외할머니께 전해 드리라고 했다. 장모님이 막내 외손주의 편지를 열어 보더니 돈 2만 원과과

편지가 들어 있었단다. 첫 월급이라 좋은 엄마를 주신 외할머니께 선물을 하고 싶은데 월급이 너무 적기도 하고 엄마

아빠가 급하게 가시는 바람에 선물 살 시간이 없어서 현금으로 보내니 널리 양해하시고 맛있는 것 사 잡수시라는

내용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식구들 골고루에게 막내다운 선물을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얇은 책으로 샀다며 “어린 왕자”를 예쁜 포장지에 싸서 가져왔다. 오래전에두어 번 읽은

책이지만 막내의 정성 때문에라도 다시 읽고 싶은데 아직 읽지 못했다. 그러나 빨리 읽고 싶지는 않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읽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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