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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꽃피우는 예술

by 은빛지붕 2023. 8. 24.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시인의 꿈에 젖어 사는 문학 소년이었다. 주변에 비슷한 관심과 성향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런 꿈에 빠져 한동안 행복할 수 있었다. 나와 내 친구 서너 명은 곧잘 어울려서 각자 지은 시나 글을 돌려가며

읽고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어쭙잖은 문사(文士) 흉내를 내기도 했다. 물론 개중에는 글 쓰는 일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글 쓴다는 핑계로 소문난 여고 학예회를 찾아다니면서 여학생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녀석들도 있었다. 얼마 후 참고서 살 돈을 전용해서 얄궂은 동인지 한 권을 발간한 뒤부터 우리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시인 행세를 했는데, 자신의 존재를 고난받은 천사들의 지상 강림으로 미화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우습기만 한 일이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한 문학 소년의 각성
그러나 의외로 작은 사건 하나가 문학에 대한 나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쉬는 시간에 모여 앉아 잡담이나 늘어놓고 있던 우리에게, 평소 클래식 기타를 잘 치던 녀석이 불쑥 질문을던졌다.

“ 도대체 입센의 <인형의 집>왜 세계명작인지 모르겠어, 너희들은 아냐?” 얼마 전에 읽고 서로 토론했던 그 책에 대해 

이 녀석은 뒤늦게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친구 하나가 장난스럽게

“세계명작전집에 나오니까”라고 하나마나한 말을 했을 뿐이다. 사실 그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나의 내면에

무시할 수 없는 충격을 남겼다. 어쩌면 그 녀석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졌던 셈인데, 나는 그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녀석이 던졌던 질문은 문학이라는 막연한 유토피아를 꿈꾸기만 했던 나에게 찾아온

각성의 기회이자 충격이었는데, 나는 주제넘게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몇 날 며칠을 끙끙댔다. 그러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인형의 집>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세계명작이고 내가 쓰는 글은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명작과 명작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니, 근본적으로 되물어서 그럼 도대체 문학예술과

문학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가졌던 물음이 결국 내가‘문학’을

거쳐서 ‘문화’를공부하는 사람으로 삶을 선택하도록 만든 내적 동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도 가고, 그 친구의

인연도 지속되지 않아 소식이 끊긴 지 오래지만 그 시절, 그가 던져준 물음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실제로 우리는 예술작품을 쉽게 접하고 또한 아무런 의문 없이 세계명작이나 명화들을 감상하지만, 예술이란 무엇인

하는 근본적 질문에 선뜻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평소 아무런 의심 없이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인

누군가로부터‘종교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 해도, 쉽사리 이 물음에 답변을 주기 힘들 것이다. 이런 답변에 대한

망설임은 단순하게 질문을 받은 당사자의 지적 능력과 별반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이런 질문에는‘정확한’ 대답보다는

‘현명한’ 대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예술 작품이나 종교의식이

숨 쉬는 공기처럼‘일상화’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예술 또는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일상화의 순간적

정지(caesura)를 요구한다. 달리말해서, 이런 정지 순간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서 ‘성찰’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예술이나 종교는 그 자체로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감추어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근본적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바로‘문화를 꽃피우는 예술’이라고 하겠다. 흥미롭게도 예술은 언제나

자신의 경계를 허물면서 문화를 풍요롭게 해 왔다. 예술을 현대판 희생제의로 불렀던 한 철학자의 평가는 이런 차원에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자기의 경계를 허무는 것일까?

 

예전에 어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고바우 영감>이라는 4단짜리 시사만화를 본 적이 있는데, 미술관에 간

고바우 영감이 잠시 벽에 세워놓았던 우산이 예술작품으로 둔갑해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된다는 줄거리였다.

<고바우 영감>의 내용은 우스꽝스러운 풍자로 이해될 수밖에 없지만, 진지하게 본다면 예술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마그리트 뒤샹이라는 프랑스계 미국 미술가는 공중 화장실에 가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에 자신의 서명만을 한 뒤 <샘>이란 제목으로 전시장에 출품했다. 이런 미술 경향을,

이미 만들어진 완성품을 가공하지 않고 재배치만 한다고 해서 “기성품(readymade) 미술”이라고 부르지만, 넓게 본다면

전위 예술(avant-garde)로 분류할 수 있겠다.어떻게 보면 노력도 없이 손쉬운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듯한 느낌도

들겠지만, 예술사적으로 본다면 이런 예술가들의 노력은 문화와 예술이라는 안과 밖이 서로 교차하면서 빚어지는

일종의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전위 예술은 대표적으로 예술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서 문화와 섞이고자 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예술은 항상 문화를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고, 문화는 그 예술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전위 예술의 경우에도 확인되듯이, 예술은 앞서 감으로써 오히려 문화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있다.


예술과 문화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언젠가 <게르마늄의 밤>이라는 일본소설을 읽은 한 후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기에서 작가가 문학을 배설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한국처럼 문화의 깊이보다 넓이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회에서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문제는 종종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기 쉽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유행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관점은 낡은 것이나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문학을 배설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무라 만게츠 같은 작가가 있는 반면, 마루야마 겐지와 같이 문학의 순수성을 위해 분투하는 작가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일본문화는 결코 두 적대자 중 어느 한쪽도 배척하지 않았다. 대중문화의 반대말은 고급문화가 아니라 소수문화이다.

소수문화는 끊임없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대중문화는 그 벗어난 소수문화를 따라잡으려 한다. 소수와 대중,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관점은 어딘가 경직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넓게 본다면 예술은 이런 소수문화에 속한다.

예술과 문화 또는 소수문화와 대중문화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 관점은 이 둘이 엄연히 공존하고 있는 현실을 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예술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현명한’ 대답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