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 모음

미래를 밝히는 힘 - 사람 사랑

by 은빛지붕 2024. 3. 5.

 

 

 

 

 흰파도가 밀려오고 하얀 구름이 덩실덩실 춤춘다. 뺨을 후려치고 도망가는 바람이 야속하기는커녕 아쉽기까지 하다. 푸른 바다와 초록 숲을 지나는 동해안 여름 기차 여행은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기차 여행은 어디를 가든 자동차 여행과 사뭇 다른 맛이 있다.

일전에 천안에서 삽교까지 기차를 탄 적이 있다. 환자 방문 시간이 길어진 관계로 예매해 둔 열차를 놓쳐 부득불 입석표로 다음 기차에 올랐다.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30분쯤 지났을까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꾸만 두리번거리며 아이들이 자리를 탐하기 시작했다. 좌석이 하늘 같이 높아 보이고 서서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딱하다 못해 신세마저 처량해진다. 그 몇 분만 지나면 되는데, 그새 못 가진 자의 온갖 상념이 스친다. 가족 네 명의 눈치가 강했던지 삽교 다음 홍성까지라 괜찮다며 초면의 한 아저씨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두애가 쏜살같이 달려가 앉는다. 그 10분간의 넉넉함과 행복감, 좌석의 큰 힘이다. 내릴 때쯤 자리 주인을 찾아 고마운 인사를 깍듯이 하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돌아올 때, 여섯 살 난 딸아이는 아예 잠이 들어 버렸다. 외할머니 댁에서의 놀이(?)가 고단했던 모양이다. 그 애를 안고, 외가의 정성이 담긴 보따리라 어쩔 수 없이 들고 낑낑대며 서울 행 기차에 올랐다. 1주일 전의 예매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열차는 만원, 원래부터 입석표였다.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애가 자는 바람에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또 자기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안 될 일이었다.

애가 언제 깰지도 모르고 종착역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리기에 극구 사양했지만 아저씨는 자는 아이를 보고 웃으며 저만큼 사라져 갔다. ‘그래, 30분을 넘지 않으리라’마음먹으며 넙신 절하는 아내의 표정은 안도와 고마움을 넘어 황송해 했다. 무작정 아무 호수든 열차에 올랐는데 그 시간에 또 그 아저씨 자리라니, 애를 흔들어 깨웠다.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게다가 옆에 앉힌 큰애마저 곯아떨어졌다. 서울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랬다. 우리 때문에 불쌍해진 아저씨, 어찌나 송구하던지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사이 서울에 도착했다. 여전히 마지막 감사의 인사 기회를 주지 않고 아저씨는 어디론가 벌써 가버렸다.

“아빠, 왜 벌써 서울이야?” 남의 자리에서 세상모른 채 자고 난 아이의 눈빛엔 생기가 넘쳐 났다. 어깨가 무거우리만큼 큰 빚이었다. 고마움이었다. “세상에 어쩌면 두 번씩이나 그렇게 신세를 지다니”, 겸연쩍고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움을 가득 안은 아내의 표정이었다. “그렇지, 좋은 분이야. 커다란 사랑의 빚을 졌어.”

 그럽시다. 내일 새벽에 함께 기도회에 참석합시다.”“네, 꼭 같이 가요.”굳게 약속을 했는데 새벽녘에서야 깊은 잠이 들었는지 도저히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부엌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에 깨보니 벌써 아침,“ 어찌 된 거예요, 여보?”“어서 더 자질 않고.” 곤히 자는 것 같아 혼자서 다녀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살짝 열어 놓고 나간 대문이 바람에 잠겨 담을 넘어 들어 왔다고. “왜 벨이라도 누르시지요?”“그러면 당신이 깰 것 같아서.”경산에 사는 초로의 부부, 다시 하던 일을 하러 저만치 가고 있는 남편의 저는 다리(오래 전에 사고로 다친)를 보는 아내의 눈엔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다리도 시원찮은 분이 담까지 넘다니, 몇 달간 심장병으로 치료받던 아내의 심장에 힘이 솟아났다.

 의사에게서 헌신의 덕목을 빼면 기술꾼, 장사꾼 이상의 취급을 받기 어렵다.”20여년을 넘게 무료 진료를 해온 이기섭(88세, 의사)님의 말이다. 1962년 이화여대부속병원장을 내려놓고 82년 속초도립병원 외과과장을 끝으로 현직에서 은퇴한 이후, 이 박사는 20여년을 넘게 매주 목요일마다 양양군 산골 마을의 무의탁 노인을 상대로 무료 진료 활동을 하는 등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시다 우리들 곁을 떠난지 만 4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 희망의 빛이 내일을 환하게 한다. 우리의 미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 실천에 달렸다. 미래를 밝히는 힘, 그것은 곧 사람 사랑이다.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짧아진 바지  (0) 2024.03.07
행복이 머무는 자리  (0) 2024.03.06
만남과 감격의 계절  (0) 2024.03.04
감정 표현의 중요성과 방법  (0) 2024.03.03
메시지의 의미  (0) 2024.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