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사장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한 것은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정직하고 성실한 그였지만
부도의 한파는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결국 폐업 신고를 내고 그가 선택한 일은 바로 공사장의
막노동이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요. 실패를 인정하기엔 우린 아직 갈 길이 멀잖아요.”
아내의 이런 격려가 없었던들 그의 방황은 좀 더 오래 갔을 것이다. “그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
하는 거야. 고난을 기회로 삼는 거야.” 소심해진 자신을 향해 그는 거듭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고난이 둘 사이의 정을 더 깊고 견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도 김 사장은 벽돌을 지고 나르다가
못에 작업복 바지를 찢기고 말았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길에 리어커 장사에게 막바지 하나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오세요. 힘들었겠네요.”남편의 안색을 살피는 아내의 모습 역시 무척 피곤해
보였다. 남편 몰래 손에 익지 않은 식당 일을 하고 온 탓이다.
“여보, 미안하지만 이 바짓단 좀 줄여 줘. 내일 입고 갈 옷이야. 일하다가 바지가 찢어졌지 뭐야.”
남편은 사 온 바지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피곤했던 탓인지 아내는 상을 채 치우지 못하고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얼마나 피곤하면 며눌 아이가 밥상 앞에서 저렇게 쓰러져 잘까….”
아들 내외가 곤히 잠든 사이 시어머니는 아들이 사 온 바지를 꺼내 길이를 줄여 놓았다.
아들의 바지 사이즈야 눈감고도 아는 어머니가 어두워진 눈을 비벼 가며 몇 시간 씨름한 결과였다.
시어머니는 그렇게라도 며느리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아내는 놀란 사람
처럼 일어나 남편 바지를 찾았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뚝딱 바지를 자른 다음 서둘러 고쳐 놓고는
밥상을 차렸다. 하마터면 찢겨진 바지를 다시 입혀 보냈을 뻔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아내가 고쳐 준 바지를 고맙게 받아 입고 일터로 향했다.
문제는 남편의 바지가 가관이었다. 그것은 칠부 바지도 아니고 반바지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그런 것에 통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만들어 주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요, 아내가 입혀 주는 옷이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옷 입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거센 삭풍이 몰아치는 언덕에 서 있어도 추위를 타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일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것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 대부분의 남자들은 다 이런 옷을 입고 싶어 한다. 반바지면 어떻고 칠부 바지면
어떠랴. 거기 어머니의 뼈저린 사랑이 묻어 있고 아내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면….
세상에 사랑으로 된 것 중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과정이 서툴고 결과가 시원치 않아도 사랑이 동기가 된 것은 결국 다 면죄부를 받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내여, 남편에게 사랑의 칠부 바지를 입혀 주라.
그리하면 남편은 순교자처럼 가족을 위하여 죽는 줄도 모르고 일할 것이다.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구리가 알아듣는 경(經) (0) | 2024.03.09 |
---|---|
“때문에”와 “위하여”사랑 (1) | 2024.03.08 |
행복이 머무는 자리 (0) | 2024.03.06 |
미래를 밝히는 힘 - 사람 사랑 (0) | 2024.03.05 |
만남과 감격의 계절 (0) | 2024.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