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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누군가는 세상에 희망의 불빛이 되어야 한다.

by 은빛지붕 2024. 4. 12.


나 다시 바다로 가련다
쓸쓸한 바다와 그 하늘을 찾아가련다
나 오직 원하는 것은
돛대 높직한 배 한 척과
방향을 가려 줄 별 하나…

 영국의 계관시인 J. 메이스필드(1878~1967)의‘그리운 바다’라는 시의 첫 부분이다. 대학을 다니며 내 입술에서 떠나지 않았던 애송시였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성장한 나는 그토록 바다를 그리워했다. 아니 그 탁 트인 검푸른 바다가 하나의 경외로 다가왔다.
 이십대를 보내며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저 너머를 항해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를 때는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그것은 단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한 꿈이었다.
 십수 년 전에 서태평양,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멀지 않은 필리핀의 어느 섬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드디어 바다를 건넌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에서 맞이한 새로운 삶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때묻지 않은 세계, 대자연의 순환의 원리가 지배하는 땅. 밤이면 파도소리 울부짖고 소리 없이 별빛이 쏟아지는 곳, 낮이면 작열하는 태양과 한낮의 나른함이 심신을 내리누르는 시간이 멈춘 세계. 이 모든 여유로운 감상은 한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 선교지에서 사귄 친구가 결혼식에 참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열대의 혼인 예식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을 자극하기도 해서 승낙했다. 2시간 거리에 있다는 예식장으로 가기 위하여 뱃길에 대한 설레는 마음으로 밤 보트(bam-boat)에 몸을 실었다. 출발이 좋았다. 수평선에 걸려 있는 열대지방 특유의 뭉게구름,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새들의 군무, 미풍에 흔들리며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코코넛 나무들, 항해의 지루함이 몰려오는 순간 수면 위를 날아올라 배 이쪽에서 저쪽으로 재빠르게 날아가는 날치 떼들, 그리 높지 않은 파도를 밀어내며 보트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의 긴박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흔들리는 배를 요람삼아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바다가 변해 있었다. 바람은 거세지고 파도는 포효(咆哮)하기 시작했다. 바다가 양에서 호랑이로 변해 있었다. 더욱 난감한 것은 목적지가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2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을 항해해야 한단다. 현지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잘못 들었던 게다. 설상가상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소형 엔진을 장착한 보트로 이 폭풍 속을, 그것도 야간에 항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시가 급하다.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아뿔사! 엔진에 물이 차 시동이 꺼져 버렸다. 파도에 떠밀린 보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가 집어삼키려는 듯 달려들었다. 비명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얼마나 시달렸을까! 두려움과 피곤이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넣고 있을 때쯤 다시 엔진이 둔탁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파도에 떠밀려 보트가 망망대해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항해 경험이 많은 뱃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최후의 공포의 탄식들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배에 둘러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대자연 앞에서 무기력함과 인간의 연약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등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형, 기도해 봐요. 형은 선교사잖아요.”뒤에 앉았던 열 살짜리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래, 너무 다급한 나머지 기도하는 걸 잊어버렸지.”우리는 남겨두었던 최후의 아니 유일한 희망인 기도에 매달렸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는 순간 거짓말같은 일이 일어났다. 너나없이 일제히 “불빛이다.”라고 소리를 쳤던 것이다. 그래 정말 불빛이었다. 파도에 가려 아른거렸지만 틀림없는 불빛이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혼인을 앞둔 신부가 신랑이 탄 배의 도착이 늦어지고 날은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자 남동생을 시켜 몇 시간째 해변에서 횃불을 흔들게 한 것이다. 그 배에 신랑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랑 덕분에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다음날 해변가에서 치러진 결혼식은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결혼식보다 아름다웠다. 어려운 살림에 해변을 크게 한바퀴 돌아오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마친 새로운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그들만을 위해 준비된 집으로 들어갔다. 세상이 참으로 노도(怒濤)하는 바다와 같이 요란하다. 그리고 갈바를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오늘도 쪽배를 타고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 혼돈한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