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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by 은빛지붕 2024. 4. 18.

 

 

 '어느 일요일 오후다. 책상 앞에 앉아 영어 단어도 외우고, 내일 모레 시험을 위해 수학 문제집도 20페이지 풀려고 했다. 친구에게 이메일도 쓰고 작문 숙제도 다 끝낸 후 저녁에는 마음 편하게 드라마를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은 혼미하며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새 깜빡 잠이 들어 버렸는지, 화들짝 깨어보니 그새 몇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어둑어둑 저녁시간이 다 되고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 봤을 것이다. 이럴 때 만약
당신이 위 글의 주인공이라면 무슨 마음이 들겠는가? 위의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이 마음속에 떠올린 말(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적어 보라.
 사람에 따라,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아마 제각각 여러 말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래 예문을 보면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지 비교해 보자.
 

1. “난 정말 한심해. 졸음 하나도 못 이기고, 게으르고 의지도 약하고….”
2. “잘 잤다. 공부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공부할 필요는 없어.”
3. “큰일 났네. 잠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걸 언제 다 끝내나. 망했다.”
4. “어떻게든 다 끝내려면 이따 밤새워야겠구나.”
5. “내가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잠이 들었구나. 내 몸이 잠을 푹 자면서 쉬고 싶었나 보다.”
 

 위에 나열한 반응 다섯 가지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여러 말 중에서 예를 몇 가지 골라본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다른 여러 표현이 있을 수 있다. 주어진 상황은 똑같지만 사람에 따라 떠올리는 생각도 다르고, 스스로에게 마음속으로 하는 말도 다르다. 그리고 위 문장들을 읽어 보면 그 말들에서 느껴지는 감정도 차이가 있다. 아마 그 다음에 어떤 마음이 들고 어떻게 행동할지도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경험을 담아내는 말
 똑같은 경험에 대해 ‘한심하다.' '괜찮다.' '잘했다.' '망했다.' 등등 여러 말로 그 경험을 묘사할 수 있다. 사실 묘사를 어떻게 하건 실제 경험한 그 무엇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경험에 대해 어떤 말로 묘사하면 실제 경험은 힘을 잃고 묘사한 말이 위력을 지닌다. 일요일에 낮잠을 잤다는 사실은 ‘한심한 짓’이 될 수도 있고, ‘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괜찮은 것’이거나 ‘망한 것’이 되기도 한다. 지금 여기서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생각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원래의 실제 경험은 한 가지인데, 그것을 ‘말’로 묘사하면 매우 다른 색깔의 여러 경험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강의 시간에 주부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 봤다. "아이를 출산할 때의 고통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죽도록 힘들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표현하면 제대로 다 표현됩니까?”라고 묻자 다들 아니라고 했다. 주부들은 저마다 여러 말로 출산의 고통을 표현했다.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하늘이 노랬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어느 표현도 실제 출산의 경험을 정확하게 충분히 표현하여 말하기는 어렵다고 수강생들은 결론지었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말에 모두 동의했다. 분명 말이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담기가 어렵다. 경험과 그 경험을 묘사하는 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막상 우리의 경험을 표현할 때는 다른 어느 것보다 말에 의존하게 된다.
 

말의 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말’의 특성을 먼저 생각해 보자. 말은 우리의 경험을 나타내고자 사용하는 최선의 도구일 수는 있지만, 그러기에는 매우 불완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른 어떤 도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편리하다. 만들기 쉽고,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하고, 기억하기도 쉽고, 저장과 기록도 용이하다.
 말이 없었다면, 인간이 이루고 사는 이처럼 복잡한 문화와 문명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있기에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풍부한 정보를 주고받을 뿐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지식과 문화의 전달이 가능해졌다. 그뿐 아니라 말로 이루어진 수많은 관습과 규칙, 법규, 약속들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행동을 규제하고 지배한다. 경험과는 또 다른 ‘말’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경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생긴 말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 있다. 유리컵에 대고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심한 욕을 하더라도 컵은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슬쩍 던진 말 한마디로도 산산조각이 나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도 한다. 말로 사람이 얼마나 크게 좌우되는지는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을까?
 본래 ‘말’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 ‘말’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지배하는 실체처럼 힘을 지닌다. 도구가 실제 경험보다 더 실제가 되어 버리고 그에 따라 우리는 현실에서의 반응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말이 지닌 이런 미묘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말에 대해 매우 이중적이고 모순된 태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는 말을 아무것도 아닌 허상으로 대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마치 절대적인 법칙이나 진리처럼 대하기도 한다. 무척이나 일관성이 없이 그때그때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말을 폄하하기도 하고 말을 절대시하기도 한다.
 부부 상담을 받으러 온 어느 부부가 서로가 상대에게 얼마나 말로 상처를 주었는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남편이 부인한테 상처 받은 일을 이야기했다. 언젠가 부부가 말다툼을 할 때 부인이 “하늘이 두 쪽이 나는 일이 있어도 당신하고는 절대 상종하지 않겠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 남편은 그 말을 마음에 곱씹다가 며칠 뒤 불쑥 부인한테 따졌다. 그러자 부인은 “그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지, 뭘 그래. 그런 걸 가지고 남자가.”라며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 넉넉지 못하게 시집 온 이 부인은 20년 전 신혼 때 어떤 일로 서로 의견 다툼이 있었을 때, 남편이 “당신처럼 고집 센 여자를 누가 데리고 살겠어? 나니까 불쌍해서 데리고 살지. 자선사업하는 셈치고.”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 말이 평생 마음에 남아 남편이 두고두고 미웠다고 한다.
 이 부부처럼 자신의 입장에 따라 말에 대해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때로는 상대의 말이 마치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무게 있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은 말을 아무렇게나 하기도 하다가 상대방이 표현한 말의 단어나 토씨 하나 때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진정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대화
 앞으로 필자는 대화에 대한 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대화의 기술이나 기법보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대화를 할 것인지를 주제로 삼았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말이란 것이 모순된 특성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말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화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으려면 말이 지닌 특성과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경험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도구 이상의 힘이 있다. 똑같은 경험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말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여긴다. 동시에 말을 진짜가 아닌 그저 허상일 뿐이라는 식의 태도로 대하기도 한다.
 분명 우리는 두 가지 세계를 넘나들며 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말’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가 진정한 소통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세계가 지닌 갭(차이)을 줄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경험의 세계와 말의 세계가 큰 괴리가 없이 일치하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 대화에 대해 이해하고 배우게 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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