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권투 시합을 본다. 양 선수가 심하다 싶을 만큼 몸의 대화를 나눈다. 승리를 위해서이다. 이와 비슷하게 작가들도 독자와 치열하게 대화를 나눈다. 다만 몸의 대화가 아닌 말의 대화라는 게 다를 뿐, 책이라는 사각의 링 위에서 싸우기는 마찬가지이다. 본격적인 서평에 앞서 양 작가를 소개하자면, 장영희는 인파이터로 접근전에 능하다. 자신의 호흡 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며, 주특기로 귀납 스타일의 문체를 구사한다. 독자가 방심한 사이 한방에 훅 가게 하는 핵 펀치를 결론 부분에서 날린다. 반면, 정혜신과 그의 수석 코치인 이명수는 아웃 복서 스타일이다. 호흡이 짧은 연역 스타일로 독자에게 치명적인 감동을 날린다. 잦은 매에 장사 없듯이 독자들은 짧은 글을 읽으면서 이들이 내두르는 경구와 감각적인 문체들에 휘둘린다. 이들의 문체는 가볍지만 잠언처럼 여운이 길다. 재미있는 것은 일반적인 권투와는 달리 장영희와 정혜신의 독자들은 맞으면 맞을수록 더 때려 달라는 주문을 한다는 점이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에 걸린 장영희는 장애라는 운명을 지고 평생을 살았으며, 세 번에 걸쳐 찾아온 암(유방암이 척추암, 간암으로 전이됨.)은 그녀의 삶을 앗아 갔다. 그녀는 <내 생애 단 한 번>(2000)이라는 첫 수필집을 통해 많은 팬을 확보했으며, 두번째인 <문학의 숲을 거닐다>(2004)로 문학적인 향기가 짙은 수필집을 낸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룰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2009)은 암 투병 중에 썼던 글을 모은 그녀의 마지막 유작이다. 정혜신은 정신과 전문의로, 그녀의 이름을 세간에 알린 <사람 vs 사람>(2005)과 <남자 vs 남자>(2009)는 ‘심리 분석을 통한 인
물 평전’의 새로운 장을 선보였다. 여기에서 다룰 정혜신과 그녀의 심리적 구루인 이명수의 <홀가분>은 삶에 지쳐 가는 현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 처방전이다. 이제 선수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고 이 두 작품에 대한 마주 보기 서평을 하고자 한다. 관전평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기적을 믿으십니까?
장영희 교수의 마지막 수필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에필로그를 보면, 장영희는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던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천장의 흐릿한 얼룩이 보였다. 비가 샌 자국인가 보다. 그런데 문득 그 얼룩이 미치도록 정겨웠다.”라고 고백한다. 모차르트의 미완성곡인 레퀴엠처럼, 그녀는 임박해 오는 죽음 앞에서 완강하게 버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살다간 흔적인 책을 남겼을 뿐이다.
그녀의 유작이 되어 버린 이 수필집에는 가슴 뭉클한 삶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다시 시작하기’는 그녀가 6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전동 타자기로 쓴 논문을 짐 꾸러미와 함께 도둑맞았을 때의 참담한 경험을 쓴 글이다. 절망 끝에 그녀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 있잖아.” 이처럼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20년 늦은 편지’를 통해 삶의 통찰을 보여 준다. 장영희는 실향민이었던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 “떠난 사람의 믿음 속에서,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일 뵈어요,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민식이의 행복론’에는 구족 화가이자 시인인 이상열의 시에서 “새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게 하소서.”를 인용한다. 행복이란 남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절실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장영희의 삶을 잘 알지 못하는 기자가 자신을 두고 ‘천형(天刑)’이라고 하자, 수필의 말미에 ‘천형은커녕 천혜(天惠)’라고 말하는 장영희의 수필집에는 이처럼 따뜻한 정감과 유머가 가득 차 있다.
요즘 홀 가분하시나요?
정혜신 박사의 <홀가분>은 인생의 지혜가 담긴 잠언 같은 책이다. 다섯 개의 심리 처방전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나 자신’과의 조우(遭遇)야말로 유일무이한 동시에 황홀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얼굴’인 ‘나 자신’과 어떻게 만날까?
‘왜 나만?’에서 저자는 “비관적 상황에 처한 암 환자의 투병 의지를 북돋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환자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은 자포자기할 것이 아니라 평소대로 자신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누군가에게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암보다 더 무서운 악이 아닐까 싶다. ‘질곡의 시간은 벼락처럼 끝난다’에서 정혜신은 “꼭 필요한 것은 10센티미터만 더 파 들어가면 금맥을 발견할지 모르는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는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닙니다. 훗날의 빛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나를 살갑게 보듬고 다독일 줄 아는 자기 긍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화 천장지구(天長地久)에서 나온 ‘부드러움이 언제나 강함을 이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정혜신의 수필집에서는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없을 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기 치유를 위한 자기 긍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야말로 쾌의 최고 경지인 ‘홀가분’이라 할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이 글은 필자의 치명적인 실수로 원고를 날리고 다시 쓴 글이다. 장영희 교수의 마법에 걸린 걸까? 장영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 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나에게 불운을 상징하는 검은 돌이 연이어 나온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하면 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장 6절)는 말씀을 믿는 것이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현명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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