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한 시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시편 62편 11절, 새번역).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정도에는 못 미쳐도 히브리 시에서는 좀 드문 표현이다. 시인이 배웠다고 하는 그 두 가지는, 하나는 “권세는 하나님의 것”과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다. 권세는 창조와 심판에 관련된 것이고, 한결같은 사랑은 용서와 회복에 관한 것이다.
목도한 종 말의 단 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정의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몇년 전 우리는 일본 동북부 지역의 지진 해일과 원전 붕괴가 가져온 가공할 위협을 목도했다. 매시간 방영되는 현장 중계는 뉴스라기보다는 차라리 TV로 읽는 계시록(啓示錄)이었다. 인류의 종말이 저렇게도 올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여진을 걱정하던 우리에게는 여진보다 더 무서운 원전 붕괴의 위협이 다가왔다. 더 강도높은 지진과 해일이 있을 때 원전 붕괴는 막지 못할 재앙이었고 방사능에 피폭된 온갖 피조물의 처절한 상처는 온갖 피조물의 종말을 예상하기에 넉넉했다.
진노의 잔 과 심 판의 끝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도덕이나 윤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가 진노의 잔을 어디에다 붓느냐에 따라 지구를 포함한 현재 인류가 발견한 대우주는 궤도가 바뀔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 일곱 개가 쏟아지는 장면을 환상 속에서 본다. 첫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니까 많은 사람이 ‘악성 종기(惡性 腫氣)’에 시달린다. 둘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바다”에 쏟으니 바닷물이 죽은 사람의 피처럼 되고 ‘바다 생물’이 다 죽는다. 셋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강과 샘”에 쏟으니까 물이 피로 변하여 마실 물이 없어진다. 넷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해(태양)”에 쏟으니까 태양에서 평소보다 더 뜨거운 열이 나와서 사람들이 태양열에 타 죽는다. 다섯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세계 모든 나라의 “왕좌(정치 1번가)”에 쏟으니까 통증과 부스럼 때문에 괴로움을 못 이긴 사람들이 모두 혀를 깨물고 자살한다. 여섯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으니까 강바닥이 드러나 대로가 되고 그 길로 온 나라의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최후의 전쟁터 아마겟돈으로 모여든다. 일곱째 천사가 그 진노의 대접을 “공중(空中)” 곧 ‘우주(宇宙) 공간(空間)’에 쏟으니까 오대양 육대주가 사라진다. 하늘에서는 ‘심판의 끝’이 선포된다.
방사능 폐기물 처리 부심
지진 해일보다 더 가공할 것으로 방사능 폐기물(放射能 廢棄物)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름 자체에 속임수가 있다. 방사능은 그리 쉽게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사능 폐기물을 지하 수백미터 밑에 저장 공간을 만들어 최대 십만 년까지 보관하여 원자로 폐연료봉에 남아 있는 방사능이 자연 상태에서 소멸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인류는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빠른 시간 안에 안전하게 없애는 방법을 찾고 있다.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부은 곳과 유사한 곳을 생각하였다. 인간이 살지 않는 오지(奧地)에 깊숙이 파묻어 볼 궁리도 했다. 망망대해 남태평양 무인도 부근에 쏟아부어 볼까도 했다. 핵보유국들이 핵 실험을 했던 곳들을 상기해 보라. 흐르는 강물이나 흐르는 샘에 쏟아부어 방사능을 없앨 궁리도 했다.
한번은 관계자들이 자구 상의 방사능 폐기물을 다 모아 지구위의 어느 활화산(活火山)에 쏘아 버리자는 제안도 했었다. 방사능 폐기물이 완전 연소되는 열, 곧 마그마는 섭씨 1만 도인데, 지구 상에서 가장 뜨거운 활화산의 마그마가 섭씨 1,600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 계획 역시 포기했다. 드디어 일군의 방사능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구 상의 방사능 폐기물을 NASA로 가지고 가서 우주선에 실어 태양 속에 그 폐기물을 집어넣어 순식간에 방사능 폐기물을 없애자는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태양 속에 현재 인류가 보관하고 있는 3만여 톤의 방사능 폐기물을 집어넣어 보았자, 그것은 대형 산불에 기름 한 방울 떨어트리는 정도로 태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NASA에서는 이 제안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반응을 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실수할 경우에 우주적 재난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하여 더 이상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우주선 발사 성공의 배후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던가를 체험한 나사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전문가들은 우주 공간 어디쯤, 공중 어딘가에 방사능 폐기물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2천 년 전에 밧모 섬에서 환상으로 본 것을 현실에서 실험을 통해 이미 가공할 파괴력과 재앙을 확인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권세에 대항할 수 있는 묘책은 그 어떤 것도 없다.
파멸의 묵 시와 사 랑의 비전
하나님의 권세에 관련된 이런 파멸의 묵시를 본 요한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에게 있는 피조물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의 비전을 동시에 본다. 그는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 강(生命水江)’을 본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른다. 강 양쪽 언덕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생명수(生命樹))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사람들은 그 과일로는 생명을 누리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약제(藥劑)로 쓴다.
밧모 섬의 요한보다 6백 년 앞서 바빌론 포로 수용소에 있던 에스겔 역시 ‘강물’ 환상을 본다(에스겔 47장 참조). 환상 중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른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물줄기를 따라간다. 한 곳에 이르러 물에 발을 담가 보니 물이 발목까지 올라온다. 또 한참을 가다가 물에 발을 담그니 물이 그의 무릎까지 차오른다. 또 얼마만큼 더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물속으로 들어가 보니 물이 허리까지 올라온다. 또 얼마를 가다가 다시 물에 들어가 보니 이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큰 강이다. 에스겔이 돌아올 때에 보니, 이미 강의 양쪽 언덕에 많은 나무가 있다.
그를 안내하던 천사가 말한다. 이 물이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 광야를 거쳐 사해(死海)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라고. 이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이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그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그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될 것이라고.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죽었던 모든 것이 살 것이라고. 그때에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느라고 강가에 늘 늘어설 것이고 어디에서나 그물을 칠 것이고, 물고기의 종류도 지중해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와 똑같이 아주 많을 것이라고.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랄 것이고, 그 모든 잎도 시들지 않을 것이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쓰일 것이라고.
희망에 관한 성경의 방정식
방정식(方程式)이 있다. ‘회개(悔改)’라는 매개체의 작용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대접 일곱 개가 연속적으로 쏟아진 것은 대접이 쏟아질 때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였기 때문이다. 회개는 쌍방의 교감이다.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도 돌이키신다. 요나는 이 방정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악이 창궐(猖獗)하여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이 그냥 니느웨를 파멸시키면 될 것인데, 왜 요나를 시켜 그 파멸을 경고하게 하시는가! 여기에 요나의 불만이 있었다. 요나가 볼 때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의 도성 니느웨는 당연히 망해야 한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면 이스라엘을 배신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하다. 자기가 경고의 메시지를 니느웨에 가서 전하면 그 악한 무리들인 니느웨가 회개할 것 같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 악한 도성을 용서하실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내려갔고, 니느웨가 경고도 받음이 없이 종말을 맞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계획을 방해하시고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신다. 결국 니느웨에서는 요나가 걱정하던 일이 발생하고 만다. 어쩌자고 이악한 무리가 회개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신분이 낮은 백성으로부터 고관대작과 임금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서서히’가 아닌 ‘즉각적’으로 악한 길에서 돌이킨단 말인가!이런 방정식을 끄집어내려면 아무래도 우리말 번역이나 외국의 현대어 번역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대로 반영한 <킹제임스 역>(1611)을 보자. 요나의 고약한 성격이 바로 이 지점에서 한 번 더 발동한다.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사용해서는 안 되는 ‘회개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켰다(they turned from their evil ways).’ 그랬더니 ‘하나님이 당신의 악을 회개하셨다(and God repented of the evil)’(요나 3장 9절 참조). 인간의 회개가 지니고 있는 ‘폭발력’을 우리는 여기에서 본다. 인간의 회개에는 하나님에게서 권세를 유보시키고 사랑을 끄집어내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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