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무섭다. 아무리 오열해도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죽음 앞에 온전히 무력하다. 죽음은 인간의 완벽한 한계이다. 그래서 잔인하다.
그렇다면 이런 유한한 인간이 어디에 기댄단 말인가. 창조주는 죽음에 대한 방책이 있는가?
“돌이킬 수 없음”, 처절한 한계이다. 벌써 몇 해가 지났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까.
햇살이 봄을 부추겨 완연하게 하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외출하기로 했다. 문제는 병아리,
봄빛과 노란 병아리의 걸음마와 딸아이의 퍼지는 웃음은 환상의 하모니였다.
병아리를 집안에 두고 나가자니 삐약삐약거리는 소리가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다.
연립주택인지라 이웃에 큰 실례, 여러 궁리 끝에 나의 지혜로운 판단(?)에 따라 종이 상자에 넣어
앞뜰 나무 아래 두기로 했다. 바깥 기운을 아는지 병아리는 별 소리를 안 냈고 가끔 내는 소리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즐거운 가족 나들이. 딸아이는 줄곧 병아리 걱정이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귀가길을 재촉했다. “어? 우리 병아리, 병아리가 없네? 내 병아리, 병아리…,
아빠 병아리가 없어요.”그때 담벼락 위에 고양이가 입맛을 다시듯 혀로 주둥이를 핥으며 스르륵
지나갔다. “저 고양이, 고양이가, 아빠 난 몰라 어떡해요.” 그 사건 때문에 아빠에 대한 딸의 신뢰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안전뿐 아니라 여러 위협으로부터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는 나의 장담이 고양이로
인해 완전히 짓밟혔다.병아리가 불쌍해서 눈물 범벅이 된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원망의 빛,‘
그래 집안에 두고갈 걸’,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이래저래 충격이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딸의 기원, 병아리가 살았으면, 고양이 뱃속에서 다시 산 채로 나왔으면,
시간을 되돌려 아침으로 돌아갔으면,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하나님이 눈물을 봄비에 담아 내려 보내셨다.
갑작스런 사고, 참사로 잃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면, 테이프를 뒤로 돌리듯 죽음 전으로
되돌렸으면, 아, 하나님은 어떤 대비책을 세우셨는가? 그저 눈물뿐이신가?
성경 누가복음 24장엔‘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온다. 그들의 심경도 참담했고 어지러웠다.
스승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망이었다. 절망과 공포에 둘러싸인 그들의 굴레를
뚫고 한 분이 끼어든다. 제자들은 마침내 그분이“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외치며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뛰어간다. 방향이 바뀌고 돌이킨다.
감격과 희열의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 한 분, 죽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때문이었다.
하나님은‘예수의 부활’을 방책으로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완전한 방책이다.
완벽한 소망이요 위로요, 무덤과 절망 밖으로 탈출이다. 예수의 부활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무덤이 끝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죽음도 돌이킬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죽은 사람은“다시 살”것이다(고린도전서 15장 51~54절). 뜨거운 희망이다.
그렇다면‘뜨거움’으로 이기자. 사랑의 기억으로 훈풍을 쐬자. 사랑의 말씀으로 가슴을 데우자.
사랑의 열망과 열정으로 더 열을 올리자. 용서와 아량으로 데운 가슴을 더 넓히자.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바로 그 자리에서 신께 굴복하자.“ 부활이요 생명”(요한복음 11장 25절)
이신 예수의 사랑에 뜨거워지자.
오늘 예수의 부활은 사랑의 부활이요 돌이킬 수 있다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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